소설 속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제와 똑같은, 실제를 어느 정도 닮은, 실제에 있을 것 같은, 실제에 없는 인물 등이다. 그 인물들의 사고와 행동을 통해서 수많은 독자들이 공감하거나 반감을 가지며 자신들의 일상을 비춰 보기도 한다. 그 가운데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삶의 가치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 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소설읽기의 재미는 시작된다.
오늘 아침 문득 `메밀꽃 필 무렵`(이효석)에 등장하는 허생원과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로버트 제임스)에 등장하는 로버트와 프란체스카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선 허생원은 나귀를 끌고 장판을 떠돌아다니며 생업을 이어가는 장돌뱅이이다. 그는 여자를 만나본 경험도 거의 없고, 장가를 든 적도 없는 주변머리라고는 거의 없는 인물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허생원처럼 메마르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도 없다 싶지만, 이 소설이 아직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가 지닌 성격의 우직함일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우직함을 간직한 인물들도 많을텐데 하필이면 허생원을 떠올린 이유는, 그는 자신이 겪은 단 하룻밤의 추억을 평생토록 보물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물방앗간에서 성씨라는 성을 가진 처녀와의 하룻밤을 보낸 이후, 그녀의 행방이 묘연해져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날 하룻밤의 일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면서 습관처럼 두고두고 꺼내보며 행복감에 빠져드는 생활을 하게 된다.
만약 허생원이 떠도는 장들마다 여성들과 밤을 보내는 인물로 설정되었다면 `메밀꽃 필 무렵`은 이토록 오랫동안 회자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생원이라는 인물은 직업과 학력을 넘어선 지점에 있는, 삶에 있어서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메밀꽃 필 무렵`을 명작으로 만들어주는 인물이다.
다음으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원작이 영화로 제작되어 로맨티스트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기도 한 소설이다. 로버트라는 인물은 `내셔널 지오그래픽`라는 잡지의 사진기자이며 작가로,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는 데 성실한 인물이다. 프란체스카 역시 따뜻한 성품의 아내와 어머니로, 자신의 가정생활을 가꾸는 데 충실한 인물이다. 로버트와 프란체스카의 만남이 불륜으로 빠지지 않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점 또한 사랑의 도피행각보다는 그들이 자신들의 추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물로 설정된 덕분이다.
프란체스카를 떠나 온 로버트는 소포만 한 번 보냈을 뿐 편지도 전화도 하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 그녀의 생활이 복잡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프란체스카와의 만남 자체만을 운명처럼 귀하게 생각하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로버트의 삶이 값진 것이다. 로버트를 떠나보낸 프란체스카도 자신의 가정생활은 물론이고, 그와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삶이 더욱 빛나는 인물이다. 허생원, 로버트, 프란체스카라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추억에 가치를 더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 데 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값지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며 이는 여타의 미물들과 구분되는 특이점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1월, 짙은 가을, 흐리거나 비 내리는 날씨, 비에 젖은 낙엽들…. 자연의 변화도 감당하기도 힘든 때에 테러, 인질극, 용의자, 체포, 사망과 같은 인간의 가치를 한층 떨어뜨리는 단어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가라앉게 만들고 있다. 인간을 값지게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