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온밥솥이 없던 시절, 밥이 식지 않도록 밥그릇을 이불로 덮어 아랫목에 두던 어머니들의 지혜를 요즘의 젊은 세대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시대의 어머니들은 가난했고 예사로운 민중에 속했고 자식 걱정이나 식구 생각이 앞설 뿐, 별다른 사회의식은 없어 보였다.
어머니들은 자식과 가족에 대한 무모할 만큼의 사랑과 희생을 여성으로서의 가치와 맞바꾼 것이다. 최근 티브이에 비친 새로운 세대의 어머니들은 이와 달라 보인다. 지식과 정보로 무장된 이들은 지나치게 세련되어 있고, 가족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과거 어머니들에 비해 무모하지도 않아 보인다. 부모의 사랑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는 않겠지만, 과거 어머니들의 삶의 바람이 자식과 가족의 안녕에 있었다면, 요즘은 그 바람이 자본으로 무장된 자식에 대한 대리 만족으로 다가와 보인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지인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방학 이면 아이들을 한국으로 다시 데리고 와 학원을 보낸다고 한다. 어느 젊은 어머니들은 단순히 아이들의 영어교육을 도와주고 싶다는 핑계로 직접 유명 영어학원에 등록을 하여 수강을 한다고 한다. 사회와 가족 안에서 부추기는 서열주의가 부모와 아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소통보다는 가족의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듯 하다.
요즘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점에 가면 음식이 맛있는 이유를 `옛날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이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을 하지만 그 어머니의 맛은 어쩌면 가난의 상징이었을 터이고 다만, 가족과 아이들을 위해 가난한 상 위에 당신의 입맛을 희생하여 내놓은 소박한 밥상이었을 것이다. 시대의 편리함이 제공하는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진 지금의 아이들에게 이 어머니의 손맛은 어쩌면 상상 속에 그려진 존재하지 않는 맛일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점심을 먹겠다고 줄을 서있는 내 모습이 추해져갈 무렵, 문득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기억해낸다. 깨비처럼 눈이 내리던 어느 해 12월 마지막 학위논문 심사가 끝났을 때 내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건 것은 부모님이셨다. 무사히 통과되었다는 말에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잘했네, 잘했네`를 연발하셨다. 심사일정을 자주 물었고 그 뒤에는 항상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나는 부모님의 조바심과 기쁨의 정체를 알고 있다. 어머니는 아마도 그들의 전반의 삶을 통해서 한국 사회 속의 생존방식을 대부분 몸으로 터득하시면서, 학력이라는 것이 길면 길수로 좋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부모님은 삶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셨지만, 부모님은 마음속에 슬픈 괴물을 키워 오셨던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 `한`이라고 말했던 그 괴물은 내 학위를 나보다도 더 오랫동안 기다려왔을 터이다.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무덤 같은/ 밥그릇을 아랫목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내 어린 발은/ 따뜻한 무덤을 향해/ 자꾸만 뻗어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배고픔보다 간절한 것이/ 기다림이라는 듯이/ 달그락달그락 하는 밥그릇을/ 더 아랫목 깊숙이 파묻었습니다.”(박형준 `해당화`)며 시골 소년 시절의 밥그릇을 기억하고 있는 어느 시인의 시선이 어머니의 아픈 무릎 못지않게 시리고 애틋하게 다가오는 점심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