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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함에 대하여!

등록일 2015-11-13 02:01 게재일 2015-11-1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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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정치는 필연적으로 인생과 결부돼 있다. 정치의 요체는 분배(分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백성이 주인인 공화국이다. 공화국(共和國)을 풀이하면 모든 사람의 입에 쌀(밥)이 들어가는 나라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배불리 먹는 나라라는 뜻이다. 더욱이 이 나라의 주인은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아니라, 백성(민)이다. 그것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이다. 기막힌 구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1997년 국제통화기금 사태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아수라판이다. 비정규직, 청년실업, 끝없는 자살행렬, 노인빈곤과 중장년의 조기퇴직과 알바 전전…. 경제적 양극화가 야기하는 정치-사회-문화적 양극화는 악화일로(惡化一路)다. 서울역과 시청광장을 찾아가 보시라! 전국 각처에서 올라온 숱한 시위대와 울분에 찬 얼굴들이 거리와 광장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텔레비전 방송은 막장드라마와 일일연속극, 노래자랑과 운동경기,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로 도배돼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2015년 시공간을 근간으로 하여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프로그램은 찾기 어렵다. 국민 우민화정책(愚民化政策)을 보란 듯 실행해도 백성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다. 이미 중독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밤중의 시사토론은 각자 주장에만 골몰해 우리의 피로를 가중할 뿐!

그렇다면 시대와 역사와 민족을 사랑하는 1%라도 출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1%의 국민만이라도 우리의 시대정신이나 명징한 역사의식, 미래기획을 일상의 양식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들려오는 소식은 긍정적이지 않다. 얼마 전 평론집을 출간한 원로 비평가의 한숨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진지한 글쓰기와 진지한 독서, 진지한 토론이 실종되어 버린 가볍고 얄팍한 요즘 지적 풍토가 두렵다.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두고 토론하며 날밤을 환하게 밝히며 20대를 살았던 사람에게 요즘 염량세태는 숨 막힐 듯하다. 왜 우리에게는 68혁명 같은 출구가 없을까, 하는 문제로 괴로워하던 시대는 사라져버렸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정의와 불의를 사유한 한국인이 적잖을 텐데, 여전히 정의는 우리와 너무 멀리 있다. 나와 가족만 손해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소시민적 이해관계로 중무장한 궁민(窮民)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 말도 안 되는 막장드라마에 한숨짓고 욕을 퍼부으며 야구와 축구에 일희일비하는 사람들! 기초적인 교통질서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보복운전을 감행하는 거리의 무법자들! 정말로 갈수록 태산이고,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언제부터 나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이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져 버렸는가?! 언제부터 우리나라는 이기주의와 가족주의가 어떤 이념이나 미덕보다 우선하는 야만적인 사회가 되고 말았는가?! 목전(目前)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제까지 지켜온 지조나 신념 따위는 내팽개쳐도 좋다는 인간들의 두터운 낯짝! 이렇게 가치가 완전히 전도된 사회에서 꺼지지 않는 등불은 누군가의 진지한 독서와 사유와 글쓰기와 토론에서 발원한다.

진지한 독서로 우리는 진지한 문제의식과 만난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인식과 사유의 지평을 확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의 글쓰기 행위로 구체화함으로써 실천의 동력을 만들어간다. 마침내 토론을 통해서 그런 인식과 사유를 타인들과 공유하거나 공론(公論)의 마당으로 들고 나가는 것이다. 이런 선순환(善循環)이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된 나라를 우리는 선진국이라 부른다.

독서와 사유, 글쓰기와 토론은 고독하고도 진지한 행위다. 토론을 제외하면 홀로 깊이 침잠해야 하기 때문이다. 끈기 있게 자아를 응시하면서 시간을 허여(許與)하고 집중적인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 그런 개개인이 만나서 엮어내는 토론의 자리는 얼마나 의미심장하며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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