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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와 지식인

등록일 2015-10-23 02:01 게재일 2015-10-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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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논어 `옹야편(雍也篇)`에 `행불유경(行不由徑)`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름길로 다니지 말라”는 말이다. 도덕경 제53장에도 `대도심이 이민호경(大道甚夷 而民好徑)`이란 표현이 있다. “큰길은 매우 평탄한데 백성들은 지름길만 좋아한다.” 그런 뜻이다. 유가와 도가의 비조(鼻祖)가 한목소리로 강조하는 것은 바르고 너른 길 버리고 좁고 빠른 길을 취하는 군상(群像)에 대한 경고다. 조급한 마음에 샛길로 다니는 인총을 나무라는 경구인 셈이다.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지식과 정보가 광속(光速)으로 난무하는 21세기 `속도전`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임에랴! 외국인들이 한국에 상륙해서 맨 처음 배우는 것이 욕지거리와 `빨리빨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속도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품성이 언제부터 고착화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른바 산업화시대를 경험하면서 느리고 굼뜬 늑장문화를 시대착오적인 퇴행으로 낙인한 지난 세기 1960~70년대 소산(所産)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의 양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는 급속도로 피폐해간다. 반상(班常)을 근간으로 한 신분제 사회는 근대로 치달려간 유럽과 비교할 때 시대착오적인 낙후성을 노정한다.

1687년 인류는 `만유인력`이라는 전인미답의 과학적 발견에 도달한다. 관성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가속도법칙에 의지해 아이작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간한 것이다. 천체운항의 법칙을 일목요연하게 풀이한 불멸의 저작이 세상의 빛과 만났던 것이다.

1687년 조선. 숙종은 희빈 장씨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고, 당쟁의 화근이 깊이 침윤하고 있었다. 100여년 세월이 흐른 1780년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에 진하사 사절로 북경에서 열하를 주유한다. 그 기록이 열하일기로 전한다. 연암은 그때 처음 수차(水車)를 본다. 1792년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연암이 함양 땅에 비로소 설치한 것이 `물레방아`였다.

같은 시공간에서 유럽은 계몽주의와 자연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지만, 조선은 그즈음 물을 동력원으로 하는 물레방아를 설치하는 수준이었다. 유럽은 석탄과 증기기관으로 미증유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근대적인 각성과 국민국가, 시민의 등장을 본다. 같은 시기 한반도는 대 물려온 당쟁과 사화(士禍)로 전국적인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것의 현저한 결과를 우리는 1862년 전후에 다시 목도하게 된다.

주체할 수 없는 낭만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 빅토르 위고의 불멸의 저작 `레 미제라블`이 출간된 해는 1862년이었다. “무상으로 교육하지 않는 사회는 야만이다!”라는 기막힌 명제를 도출해낸 학술원 회원 빅토르 위고.

그 시기 조선은 진주민란을 필두(筆頭)로 한 사회불안이 반도 전체를 휩쓸고 있었던 철종 13년. 동학 창시자 최제우를 잡아들여 바야흐로 그 목을 치려고 했던 시기가 1862년이었다. 달라도 어찌 이리 달랐단 말인가?!

지식인은 언제나 속도를 생각한다. 후진국 먹물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그것이 1917년 10월 혁명의 레닌과 트로츠키로 현현(顯現)한다. 중국의 모택동과 주은래, 68혁명의 여성 지도자 구드룬 엔슬린도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본이다. 대체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이며, 근대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고,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지를 두고두고 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빨리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것은 무너진 제국 소비에트 러시아가 웅변했고, 실패한 적군파 이념이 적시한다. 노자도 공자도 2천500년 전에 갈파했다.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전진하라. 역사에 지름길은 없다. 아프고 고통스럽더라도 에둘러 갈 수 없다. 견디고 다시 견디면서 전진해야 한다. 하루의 전변(轉變)과 사계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자연과 우주를 통관(通觀)하는 장쾌한 시야를 확보하는 대도(大道)의 여유로움이 한반도 지식인을 감싸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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