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채(蕩平菜)`는 녹두묵에 고기볶음·미나리·김 등을 섞어 만든 묵무침이다. 봄·가을철에 입맛을 돋워주는 음식으로, 두견화전·화면·진달래 화채·향애단(쑥경단)과 함께 삼짇날에 먹는 절식이기도 하다. 극심한 당파싸움에 전전긍긍하던 조선 21대왕 영조(英祖)는 1762년 소론과 가깝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직접 가두어 죽이는 전대미문의 참극을 빚어낸다. `탕평채`는 영조가 당쟁을 바로잡으려고 당파를 고루 등용하겠다는 탕평책을 내놓는 자리에 내놓았던 음식으로 유명하다.
친박과 비박, 친노와 비노라는 낯선 이름으로 갈려 싸우고 있는 오늘날 정치판은 조선시대 나라를 끝내 망쳐먹은 사색당파(四色黨派) 싸움과 똑 닮아 있다. 사색당파는 처음 동인·서인·남인·북인을, 나중에는 노론·소론·남인·북인의 4대 당파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예나 지금이나 서로 `다르다`고 우기지만, 그 사소한 차이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허접한 논리가 필요하고, 추악한 이전투구를 변명하자면 창피스러운 구실부터 앞선다. 정치판에 드리운 `국사 교과서` 논쟁 먹구름이 날이 갈수록 험악한 빛깔로 치닫고 있다. 내년도 나라 살림살이를 놓고 세세히 뜯어보아 깎고 붙이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태부족할 정기국회 기간에 여야 정치권은 두 패로 쫙 갈려 치열한 멱살잡이에 빠져들고 있다. 새누리당은 현행 국사 교과서의 편향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연일 홍보하고 있다. `국사학자들 90%가 좌파로 전환했다`는 통계도 끄집어내놓았다.
좌파권력 주도권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던 야권은 문재인-심상정-천정배 3인이 만나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공동 대응하겠다며 손을 맞잡았다. 문재인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를 싸잡아 `부친들의 친일-독재 미화 의도`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야권은 국사 교과서 문제를 내년도 예산안 처리와 연계하려는 움직임마저 얼비친다. 얼개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 만들어질 교과서에 `유신 미화` 또는 `독재합리화`딱지를 붙이는 것은 명백한 `비논리`다.
그런 주장들은 오로지 `선동`을 위한 `프레임`음모로 읽혀진다. 야권은 민주-반민주, 독재-반독재 프레임의 투쟁에서 성과를 거두었던 경험에 묶여서 번번이 그 유사한 전선(戰線)을 구축하려고 드는 독특한 관성을 갖고 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국사 교과서` 개편 논쟁을 놓고 `신(神)의 한 수`로 해석하는 정치권의 촌평이 있다. 균열 기미를 드러낸 새누리당의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키는 동시에, 허청거리던 문재인 대표를 벌떡 일으켜 세운 묘수라는 것이다. 정부여당이 하나로 뭉치고, 야권이 `교과서`를 빌미로 머리를 맞대기 시작한 것을 보면 그런 분석이 무리는 아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런 정치공학 속에 `국민`이 전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명분을 모아서 정당을 꾸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국리민복을 우선하는 `대의`가 아닌, 친소관계나 사리(私利)를 기준으로 이합집산하여 구차한 논리로 유치한 멱살잡이에 열중하는 짓은 예나 지금이나 나라말아 먹을 망발에 불과하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운위되고 있는 또 다른 이 `사색당파` 논란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영조는 유생들의 당론 관련 상소를 금지시키고,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웠다. 왕위를 물려받은 정조는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명명하고, 서얼(庶孼)까지도 글 잘하는 사람을 등용했다. 하지만, 한번 형성된 고질적 사색당파 정쟁의 폐해는 좀처럼 근절되지 않았다. 친박·비박·친노·비노… 그 덧없는 구분과 정쟁이 역사에 어떤 폐단을 남길 것인지 걱정스럽다. 저 어지빠른 예단(豫斷)과 과장(誇張)의 망령, 정치꾼들의 꼼수와 음험한 정쟁 모략들을 단념시킬 감동적인 탕평채는 정녕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