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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근대성

등록일 2015-10-09 02:01 게재일 2015-10-0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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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살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을까?!” 평균적인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근간(根幹)이 언제 형성되었고, 어떤 변화과정을 거쳤는가.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다.

519년을 견뎌온 조선왕조를 무너뜨린 것은 한국 민초(民草)들의 봉기가 아니었다. 우리보다 빨리 근대국가의 기틀을 다진 일제(日帝)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왕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 일제를 무너뜨린 것도 한국인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열강(列强)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고 선언해서 어느 날 불시(不時)에 해방된 것이다. 1945년부터 48년까지 이른바`해방공간`에서 한국인들은 필설(筆舌)로 다하기 힘들 정도의 혼란과 동요를 경험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는 불과 2년 만에 6·25 한국전쟁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무려 50개국에 이르는 나라들의 참전과 도움으로 3년 만에 휴전상태로 들어간다. 그 이후의 역사과정은 재론(再論)을 요하지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오늘날 한국인의 사유와 인식과 실천과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이 언제 어떻게 마련되었는지에 있다. 위에 거명한 역사적 전변(轉變)이나 시공간 속에서 기준이 확립되었는가. 아니라면, 언제 형성되었을까?!

근대성의 출발은 자의식(自意識)과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바닥 모를 문제제기와 해답의 모색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인은 누구인가?” 혹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내지 “우리나라는 어떤 국가를 지향하는가?” 따위의 근원적인 문제를 사유하고 거기 합당한 결론을 내려야 마땅하리라. 그런데 과문(寡聞)한 탓인지 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어느 누군가가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왜 그런가?!

우리의 근대는 이식(利殖)된 근대였고, 그 중심에 일본과 미국이 자리한다. 유럽의 근대를 일본의 방식대로 체화한 일본의 근대가 무비판적으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었다. 그것이 결과한 부정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모던껄`과 `모던뽀이` 아닌가. 일제 패망 이후에는 양키문화가 거침없이 한반도 남단을 점령해버렸고, 이제는 영어를 지껄일 줄 아는 자가 지배자로 등극(登極)하는 세상이 되고 만다.

일제 강점기를 관통한 친일부역 도당과 반공(反共)을 외치면 모든 것이 허용되었던 친일부역 무뢰배들의 득세(得勢)는 우리의 근대사를 얼룩지게 만든 근인(根因)이다. 우리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지, 일제치하 선각자들의 영혼과 정신을 잇고 있는지, 해방공간의 치열한 이념투쟁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지, 새마을운동으로 표상(表象)되는 소위 조국근대화에 물길을 대고 있는지, 나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 왜 그런가?!

우리가 말하는 조국 근대화의 핵심은 한 마디로 `잘 살아보자!`였다. 영혼과 정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살아보자는 것이 골간(骨幹)이다. 거기에는 역사와 전통과 문화와 예술은 자리할 곳이 없었다. 5천년 문화민족을 자처해온 이 나라 국민들은 `궁민 (窮民)`으로 전락하여 오로지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게 되고 말았다. 소득향상이 개인과 국가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립근거가 되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처럼 이제는 돌아볼 때도 지났다. 지금보다 물질적으로 더욱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은 버려도 지날 만큼 풍요로운 시대에 우리는 자리한다. 지금부터라도 최소한 우리의 뿌리가 어디서 연원했는지, 지구촌 일원으로서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역사적 존재의의는 무엇인지, 숙고할 시점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졸부(猝富)들의 야만적이고 촌스러운 행각(行脚)은 그만 던져버리고 영혼과 정신을 살찌우는 것에 힘을 모으면 어떻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가 흥행(興行)하는 21세기를 풍요롭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첩경(捷徑)일지도 모른다. 한국인의 정체성과 근대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우리 세대의 일로 끝막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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