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는 친구가 제일로 여겨진다. 무엇이든 친구와 함께하고, 부모님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도 친구에게 터놓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보다 친구를 더 믿고 의지하기도 한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의지하다가 학창시절에는 친구에게 의지하고, 이성에 눈을 뜨면 연애에 빠지고, 사회에 나가면 또 직장동료라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간다.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자연스런 변화 양상이다.
내가 30대일 때도 그랬다. 이런 변화를 두고 사람들은 “우정이 옛날 같지 않다.” “친구들이 이기적으로 변했다.”고 섭섭해한다. 어릴 때 우정으로 뭉쳤던 친구들이 세월이 가면서 자기 살기 바빠서 자주 만나기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모여도 예전처럼 반갑지 않고 시들하기만 하다. 우정은 있지만 어릴 때 처럼 정겹고, 다정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회생활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자신을 돌아보고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필요할 때 마음놓고 소주 한 잔 마실 친구가 없어요. 누구는 왠지 불편하고, 누구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머리가 아프고, 누구는 남하고 타협을 할 줄 몰라 피곤해요.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을 피하다보니 주위에 사람이 자꾸 줄고, 진심으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없어요. 추석날 고향에 내려가도 예전에 많이 모이던 친구들이 이제는 불과 한두명밖에 모이지 않아요. 그것도 마지못해 나오는 것 같아요.”
대인관계가 가장 크게 변화하는 계기는 결혼을 전후해서다. 결혼하면 친구와의 만남도 점점 드물어진다. 부인의 눈치를 봐야 하니까 친구에게 술 한잔 사기도 힘들다. 여자의 경우라면 남편과 자식 챙기느라 옛 친구와 저녁약속 한번 하기가 어렵다. 가정이 있으니까 혼자 살 때 처럼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만날 수도 없다.
대구서 학교를 다니다 서울서 생활하게 된 집 사람의 경우는 일년내내 친구들과 만날 기회조차 없다. 대학시절 매일같이 붙어다니던 친구들과도 명절 전후해 전화나 문자로 안부를 전하는 게 고작이다. 그래도 별 달리 불만은 없어 보인다. 두 딸과 아들 하나 건사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란다며 바빠한다. 직장때문에 4년째 주말부부로 지내는 나로서는 “애들 건사하느라 수고가 많다”고 깍듯한 인사로 미안한 마음을 전할 뿐이다.
지금 한 지붕아래 웃고 울며 지내는 내 아이들인들 어찌 알랴. 떨어져 살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형제자매도 세월이 흐르면 뿔뿔이 흩어지게 마련인 것을. 같은 밥상에서 밥먹고 옷을 나눠 입던 형제자매도 자기 가정을 가지면 다 제 갈 길을 가게 된다. 그러면 부모형제를 내 마음대로 도와주기도 어려워진다. 가정을 따로 꾸렸으니까 부인이나 남편이 “우리 쓸 것도 없는 데, 왜 당신 마음대로 형제(자매)에게 줬느냐”고 따지면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친구가 멀어지고, 형제자매 마저 예전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몸담은 울타리가 달라지면서 생기는, 자연스런 변화다. 당연하고, 자연스런 변화인 데도 우리는 옛날 기억속에 “그때가 좋았다”며 추억에 매달린다. 친구들이 멀어지는 변화에 당황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친구들이 나쁘고 의리없는 게 아니다. 형제자매가 멀어지고 소원해진게 아니다. 누구는 불편하고, 누구는 피곤해서 만나도 편하지 않다는 건 본인도 친구들에 대한 우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증거다. 형제자매가 멀어지거나 소원해지기보다 내가 챙겨야 할 식구가 생겼기에 나 스스로도 형제자매들을 잘 챙기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람관계가 변하는 것을 억지로 잡으려고 해봐야 소용없다. `오는 사람 막지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마라`는 말이 있듯이 떠난다고 아쉬워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않아야 편안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래야 새로운 인연도 만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청와대와 친박계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오픈 프라이머리를 고집하는 것 역시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가려는 몸짓이니 나무라거나 말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