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물을 마루의 패인 곳에 엎지르면 풀잎은 떠서 배가 되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바닥에 닿는다.(覆杯水於拗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謬)` 장자(莊子) 내편에 나오는 이 어록은 오늘날 많은 교훈과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물의 깊이를 생각지 않고 무작정 큰 배를 띄우려는 어리석음과, 배의 크기를 감안치 않고 물의 깊이를 설정하는 경솔을 함께 경계한다.
추석을 지나면서 민심의 요동이 깊어지고 있다. 한가위 명절에 동서남북으로 오간 정치담론들이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 흐름들을 세세히 분석해보면 민심의 물줄기를 충동했던 논란들이 품고 있는 여파나 폭발력은 사뭇 다르다. 외견상 여유로운 듯 운위된 영남권 논란의 테마들은 퇴행적인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한다. 반면에 호남의 격론들은 비록 혼란스러웠지만,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잔영을 남긴다.
전국의 여론밥상을 휘저으며 입줄에 오르내린 논쟁의 중심축은 단연 내년 4월 `제20대 총선`이었다. 대구·경북(TK)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노여움에 가득 차 언급했던 `배신`에 대한 실체와 그 여파에 대한 갑론을박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박 대통령에 힘입어 입문한 지역정치인들의 역할에 대한 평론들이 꽤 나온 모양이다.
박 대통령이 곤경에 처했을 때, 이를 막아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희생에 나선 지역정치인들이 드물었다는 비판에는 공감할 측면이 있다. 하지만 작금 회자되고 있는 설계도 그대로 박 대통령의 서운함이 정말로 `TK 물갈이`로 이어진다고 상상해보자. 그래서 청와대 안팎의 친박 요인(要人)들이 낙하산타고 내려와 기존 정치인들을 `배은망덕` 딱지 붙여 모두 밀어내고 안착했다고 치자.
그런 결과에 “TK정치가 한 걸음 진화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과연 얼마나 남게 될까. 그렇게, 지역 유권자들이 몰표로 정치지도자의 언짢음을 풀어주는 일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참다운 진전일 것인가. 추석을 전후로 정치권에 흐르기 시작한 기류를 살펴보면 그게 그렇게 간단할 것 같지는 않다. TK 유권자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청와대 총선 관여`에 대한 찬반 여론조사에서 47.8%가 반대하고 36.6%가 찬성했다는 한 조사결과는 미묘한 해석을 부른다.
정말 긴장감을 가져야 할 대목은 지난 22~24일 전국 성인 1천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다. `정권심판론`에 대한 긍정여론이 42%, `정권 안정론` 지지가 36%로 나타난 이 조사결과는 민심이 어느 방향으로 미동하고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극단적인 분열상을 다스리지 못해 `죽을 쑤고 있는` 야당에 대해서 민심은 아직 기대를 접지 않고, 그 진통이 일궈낼 새로운 감동을 여전히 고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새누리당은 지금 이렇게, 미래권력의 향방이 걸린 `공천`문제를 놓고 내홍을 키워갈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국민들은 진일보된 새로운 공천문화를 통해 아직도 `3류` 취급을 받고 있는 정치가 한 발짝 선진화되기를 소망한다. `낙하산` 정치가 정치혁신을 일궈낸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참다운 민주주의를 향한 민초들의 꺼지지 않는 갈망은 존중돼야 한다. 김무성 대표의 “단 한 명도 전략공천하지 않겠다”는 공언은 그래서 신선하게 들린다.
`낙하산` 은전(恩典)을 입은 정치인들은 철새·풍향계(風向鷄)정객이 될 개연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최근의 작위정치(作爲政治) 조짐 전후좌우를 찬찬히 음미해보면 더욱 그렇다. 도도한 민심의 바다를 함부로 가늠하는 자 누구인가. 망망대해에 작은 배를 마구 띄우는 일은 위험천만하다. 비록 잠잠하다 해도, 바다가 어디 섣부른 돌팔매질을 쉬이 허용하던가. 지금이야말로 `물의 깊이`와 `배의 크기`를 정확하게 가늠해야 할 때다. TK가 더 이상 케케묵은 `낙하산 정치` 시험장이 돼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