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고 추석이 가까워지는 탓인지 이런 저런 상념이 찾아든다. 우리는 왜 항상 행복하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심지어 `대한민국 자살공화국`이라는 말까지 유행어로 나돌 정도로 말이다. 또 우리는 왜 항상 먹고 살기 바쁜 걸까? 필자는 늘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많이 일한다고 생각한다. 술을 마셔도 1차로 끝나지 않고, 2차, 3차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고, 맥주나 소주를 마실때는 기어이 `폭탄주`로 폭음한다. `샐러드 무한 리필`이나 `뷔페` 식당처럼 무한대로 먹을 수 있는 식당이 그토록 많은 것도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이라는 관념 때문인 건지 모르겠다.
타국에 나가 밤낮 없이 일하며 `석세스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는 `의지의 한국인` 시리즈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뭐든 불도저처럼 끝까지 밀어붙여 극한까지 올라가 기어이 이뤄내는 것이 과거 이 나라 성장의 원동력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급박한 도시의 삶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지쳐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는 근면함을 바탕으로 기술력을 집중시키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창의성이나 상상력이 바탕이 되는 `소프트웨어 시대`다. 다시 말하면, 뼈빠지게 일하는 것에서 제대로 쉬는 것으로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시기인 것이다.
그야말로 삶의 태도를 바꾸는 새로운 행복 패러다임이 필요한 때가 왔다. 독일의 의사이자 코미디언인 에카르트 폰 히르슈하우젠은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를 통해 행복을 좇지 말고 행복이 스스로 찾아오게끔 하라고 충고한다. 행복을 공동, 우연, 순간, 자기극복, 충만의 키워드로 분류하고 스스로가 행복해 질 수 있게 되는 다양하고 기발한 방법을 개발하라는 것이다.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국제학술상 `필즈상` 수상자인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는 `학문의 즐거움`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자신은 미리 남보다 두세 곱절 투자할 각오로 한다. 그것이야 말로 평범한 두뇌를 가진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사업에 실패해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한 사업가의 말이 떠오른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행복의 기준조차 없었다. 그저 돈이 있으면, 행복은 따라올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행복하기 위한 모든 방법들을 찾는 한편 이를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 중이다.”
인생의 목적이 뭘까? 모르긴 해도 `행복`이란 단어를 말하는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저마다의 가치기준에 따라 행복의 조건은 달라진다. 누군가는 `꿈`을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가족`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보편타당한 행복의 기준은 `돈`이다. “돈만 있으면 행복해 질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이 명제는 절대불변의 진리같다. 부모 자식간, 형제간, 돈 때문에 죽이고 등까지 지고 원수가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우리는 우리가 행복해지려고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이제 행복의 기준을 바꿔보자. 그저 돈이 있으면, 행복은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망상은 이제 버리자. 행복하기 위한 다른 많은 방법들을 찾고, 이를 실천에 옮겨보자. `행복해지기 위한 생각`에 몰두하자.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가 “우리는 당장의 안락을 위해서 미래의 비전에 눈을 감는다”고 비판한 것처럼 전문가는 많지만 사회 전반의 문제와 모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인간의 가치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거나 세상의 다양한 문화들에 깊은 관심을 가져보자. 더 나은 삶을 위한 우리 모두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일체유심조라 했다. 1천수백년전 원효대사가 갈파한 이 말은 영원한 진리다. 행복은`마음 먹기`달린 일이 아니던가. 우리나라 경제수준은 세계 상위권인데, 국민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하위권이다. `마음을 잘못 먹은 탓`이다. 잘 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달려오느라 너무 지쳤다. “이제 좀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