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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등록일 2015-09-11 02:01 게재일 2015-09-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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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암살`이 1천300만 관객을 향해 순항하고 있다. 36년의 일제강점기는 한민족 최대의 수치인 을사늑약과 경술국치가 결과한 것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촉발된 상해임시정부와 의열단 결성은 꺼져가던 식민지 해방운동의 교두보로 작용한다. 그것은 나석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쾌거로 이어진다.

약산 김원봉 선생이 주도한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15인을 구성원으로 결성된다.

“정의(正義)의 일을 맹렬(猛烈)하게 실행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체가 의열단이었다.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이 의열단의 이념과 활동방향에서 절대적인 지침(指針)이었다. `선언`에서 단재 선생은 `민중직접혁명`과`평등주의`를 내세운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정치(武斷政治)에서 문화정책(文化政策)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에 따라 국내외의 독립 운동가들은 문화주의(장덕수), 외교론(이승만), 준비론(안창호) 등을 제기한다. 신채호 선생은 그와 같은 활동을 미온적(微溫的)이라 평가하면서 `폭력적 민중혁명`을 제창한 것이다. 외교나 문화 같은 방식으로 일제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단재는 혁명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암살(暗殺)과 파괴(破壞)를 제시한다.

조선총독과 고관, 군 수뇌부,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친일 토호세력 제거가 암살 대상이었다. 단재 선생은 열거된 일곱 부류에 속하는 자들을 죽여도 좋다고 하여 `가살(可殺)`이라 명명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이 주도한 임시정부 역시 `7가살`이라는 이름으로 척결대상을 지정했는데, 단재의 `가살`과 동일한 범주의 인물이었다. `의열단선언`에서 제시된 파괴 대상으로는 조손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등이 포함되었다.

나석주 의사는 1926년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이봉창 의사는 일제의 심장부 동경에서 히로이토에게 폭탄을 던짐으로써 제국의 수도 역시 안심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폭탄투척은 중국인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런 형태의 물리적 폭력을 통한 조국 해방운동 내지 독립운동은 민족적 자긍심과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밀알로도 기능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점차 왜소해진다. 허다한 인텔리들은 모던뽀이와 모던껄로 전락(轉落)하여 `암살`의 미츠코 같은 인물로 타락(墮落)한다. 그런 와중에도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은 의연(毅然)하게 조국해방과 독립의 외길인생을 걸어간다. 약산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요새 돈으로 환산하면 300억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일제에게 약산은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요즘 새누리당과 교육부 장관이 앞장서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난리법석이란 소식이 들린다. 21세기 대명천지에서 특정정파와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교과서를 만들어 다음세대를 가르치겠다는 반민주적인 발상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는 국가의 개입보다는 시민들의 다원성과 자율성에 기초한 사회적 합의가 중요한 시기다. 국가 간의 첨예(尖銳)한 이해관계와 시각 차이를 깊이 있게 조명하는 작업도 유의미하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보다 약산 김원봉 같은 망각된 독립 운동가들이나, 6·25를 전후한 시점에 이루어진 광범위한 민간인 학살 같은 피어린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하리라 믿는다. 잘못된 역사는 반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야 `암살`같은 영화를 보면서 우리 어린것들이 새삼스럽게 한국사를 성찰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오늘 우리의 결정 하나가 훗날 역사가 된다는 엄중(嚴重)한 사실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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