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는 현재 두 개의 기차역이 운영되고 있다. 사통팔달 교통망 구축으로 내륙교통의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는 동대구역과 도심권 중심부에 위치해 편리함을 더해주는 대구역은 우리민족의 굴곡진 역사만큼이나 깊은 사연을 간직한 채 오늘도 수많은 여행객들의 왕래가 이어지고 있다.
1969년 영업을 시작한 동대구역보다 60여년 앞서 건립된 대구역은 일제강점기 우리의 아픈 역사만큼이나 힘겨웠던 사연들을 간직한 채 변모해왔다. 2003년 대구역은 민자 역사 개발계획에 의해 롯데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외지 유통업체에 의해 대구의 내수시장이 잠식된 첫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에서 드러난 국내자본의 해외유출은 재계 순위 5위인 롯데백화점에 대한 인식 변화에 큰 영향을 줬다. 유통업계 공룡기업이 보여준 부도덕한 모습과 일본기업에 대한 반감 등은 롯데백화점의 불매운동으로 이어질 정도로 그 여파는 컸다. 이렇게 일제강점기부터 영남지역의 자본이 고스란히 일본으로 유출되던 창구역할을 했던 대구역의 옛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1905년 건립되어 올해로 110년이 된 `대구역(大邱驛)`의 긴 역사를 잠시 되돌아보면 현재 대구역이 위치해 있는 도로의 이름은 태평로이다. 여기에서 `태평(太平)`이란 말은 대구 시민의 태평성대를 바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 곳은 일제강점기 대구에 식민지 자본이 가장 먼저 점령한 지역이기도 하다. 1903년부터 경부선 공사로 대구역 주변과 중심가 일대의 토지들을 매입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1904년 1월 경부철도 남부공사 건설사무소가 설치되면서 1천500여 명이 대구에 거주하게 되었다. 경부선 공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철도공사를 수주한 회사들과 8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대구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시가지 쪽의 철도용지 6천800여 평을 차용하고 2천여원의 재원을 확보해 각종 철도 부대시설을 짓고 역전 도로광장도로가에 상점을 개점해 상권을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1913년경에는 정거장 확장을 위해 모두 환수되고 말았다. 대구역을 중심으로 태평로 좌우는 1910년대 중반에 도로가 개설됐으며, 대구역에서 경북도청(경상감영공원) 사이의 길들은 1913년 개척됐다. 그리고 대구역에서 반월당을 횡단하는 중앙통은 1917년 개설돼 현재의 중앙로가 된 것이다. 1924년에는 대구역 전면 동서방향의 대로가 금정통(태평로)으로 새롭게 조성되면서 중앙로 쪽으로 일본인들의 근대 상권이 하나 둘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 또한 대구역 광장에서 동성로까지의 연장 도로들도 같은 해에 완공돼, 경부선 대구역을 중심으로 물류중심 기지가 형성되는 발판이 됐다. 태평로는 자본이 결집된 기업들이 많아 1920~30년대에는 좌익노동운동이 성행했으며, 1930년 마루보시 운송회사의 파업과 해방직후인 1946년 10월 항쟁은 대구를 격동의 현장으로 몰아넣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경부선 개설과 동시에 대구의 경제권은 부산에 의해 지배당했다. 모든 물류들이 부산을 거쳐 대구로 들어 왔으며, 1920년대가 넘어야 일본의 오사카와 교토와 직접 교류하는 노선이 대구역을 통해 구축됐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교류와 함께 우리의 자본과 자원들이 고스란히 약탈됐던 대구역의 역할과 기능은 10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별반 변화된 모습 없이 당시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가는 듯해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