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서울 덕수궁 미술관에서 마련되고 있는 `이쾌대 회고전`을 보고 왔다. 20년만에 접하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그동안 기억 속에서만 가물가물하게 남아있던 그의 작품들을 새롭게 각인할 수 있는 뜻 깊은 전시회였다.
필자와 이쾌대와의 인연은 20여년전인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역 방송사의 개국 기념 특별전 기획 의뢰를 받고 제일 먼저 추천했던 작가가 이쾌대였다. 지역을 대표하는 근대작가로 전혀 손색이 없다는 점과 88년 월·납북 예술인 해금조치 이후 국내에서는 이렇다 할 회고전이 마련되지 못한 터라 대구에서 꼭 한번은 내손으로 마련하고 싶었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전시 기획에 따른 모든 여건들이 요즘처럼 넉넉하질 못했다. 대형전시에 따른 예산과 운반차량, 장비, 복원기술 등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대구전시를 위해 흔쾌히 작품 모두를 빌려주셨던 유족들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저 고맙고, 죄송스럽게만 느껴진다.
짧은 큐레이터 경력에 무조건 전시회를 유치해 보려는 욕심을 너그러운 배려로 수용해주셨던 유족들이 필자에게 정말 큰 경험이었고, 공부였다.
광복 70주년과 작고 50주년을 마련해 기획된 이번 이쾌대의 회고전은 한국근대미술사에 있어 그의 명성과는 달리 아직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존재로 여겨질 것 이다. 그는 1913년 1월 16일 경북 칠곡군 지천면에서 대지주인 아버지 이경옥과 어머니 윤정열의 이남 사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그의 부친은 대한제국 시절 창원고을 원을 지내기도 했던 대지주였다. 그의 형 이여성은 한국 복식사 분야를 개척한 학자이자 진보적 민족주의 정치가였으며, 제국주의의 폐해를 고발한 언론인이자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역사화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1921년 이쾌대는 칠곡군 신동소학교에 입학했다가 1923년 대구 수창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28년 졸업했다. 당시 수창초등학교에는 대구의 대표적인 서양화가 이인성이 같은 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 후 그는 서울 휘문고보로 진학 하여 1학년 담임 이였던 미술선생 장발을 만나면서 미술과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하며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귀국한 그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쾌대의 작품들은 화가의 삶을 꾸미거나 신화화할 필요 없이, 작품 자체가 크고 진한 울림을 전해 준다. 그 울림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나 그 자신을 둘러 싼 신화적 세계 속의 위대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어낸 삶과 그려낸 세계가 우리들에게 까맣게 잊고 지내 온 세계를 충격적으로 보여준다는 데서 나온다. 아마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현대미술은 중요한 부분을 잃어 버렸을 것이다. 특히 해방공간이라는 짧은 기간, 그렇지만 가장 뜨겁게 타 올랐던 격동적인 삶의 현장들을 그의 작품을 통해 일부나마 되찾게 되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스케일과 구도는 오히려 낯설 정도로 생소한 충격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우리의 현대미술이 지니고 있는 갈등과 모순과 혼란을 깊은 감동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작품들은 1920~30년대 향토주의를 비롯한 민족주의 논쟁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어찌 보면 1980년대를 풍미했던 리얼리즘 미학에 하나의 역사적 실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