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내뱉는 `예술가는 가난해야한다`는 근대적 경구가 공허하게 들리는 순간이다. 그 가난의 이름은 몸의 가난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가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예술의 창조성에서 기인한다. 그러기에 가난의 아름다움은 예술이라는 진실의 아름다움이자, 가난을 용인하고 강요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카르텔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힘 있는 예술적 용기인 것이다. 가난을 확인하고 수용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너그러움과 용기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한 예술가의 죽음 앞에서 가난의 아름다움과 예술의 진실은 한 개인의 가난일 뿐이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정당한 논리가 되 버렸다. 예술적 가난의 창조성은 이제 현대사회가 조장하는 철저히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가난 앞에서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연극판이라는 열악한 예술의 노동환경과 저임금을 감수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사랑하는 것들을 희생해야만 했다. 저주받은 존재인 가난한 예술가에게 천박한 물신주의 가치관으로 무장한 이 사회는 싸늘한 멸시와 천대의 눈길을 보냈다. 생존을 위한 그의 위태로운 몸짓은 그 삶만큼이나 비참하고 외롭게 끝이 났다. 간혹 그가 `우리도 인간이다`라고 절규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말할 때, 이 퍽퍽한 사회는 그에게 `그럴 여유가 없다`며 외면하도록 했다. 이는 이 예술가의 죽음이 개인의 죽음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죽음이라고 말해야 하는 까닭이기도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로지 운이 좋았던 덕택에/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던 것을/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해 얘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내 자신이 미워졌다”고 절규하던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시구절처럼 우리는 어느새 자본주의의 그늘아래에서 `강한 자`로 살아남기 위해 가난한 예술가들을 자본주의 희생의 첨병으로 내몰고 있지만, 우리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인간적인 자본의 머슴 처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우리의 인간성은 더욱 마모되어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최소한의 `내 자신이 미워지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같은 개인의 정서적 합리화조차도 메마른지 오래다.
오지도 않을 희망을 기다리며 어둡고 추한 시간을 견디어 내는 사람들에게 하루의 노동은 얼마나 고단한 것일까. 시퍼렇게 머리는 살아 있는데 당장 끼니를 걱정하며 엉거주춤 허리가 휘어가는 이들에게, 꺼지지 않는 도시의 찬란한 네온사인들과 아파트의 불빛은 어떤 시선으로 다가올까?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단칸방에서 전기세가 밀려 추위에 떨며 소주로 추위를 달래며 아시잠에 시달렸을 이 예술가에게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애당초 내일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긴 노동의 품삯을 기대했던 그에게 예술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세상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그의 가슴을 곡괭이질처럼 후벼내어 운이 좋아 오래 살아남은 우리는 무엇인가. 이런 불미스러운 일에 끼어들지 말라며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고 침묵을 강요하는 이 사회는 무엇인가.
`의미`와 `무엇들`을 자문하는 동안, 연극 무대에 있어야 할 이가 생계를 위해 노동 현장에서 막노동을 전전했을 그를 떠올리다, 갑자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지겹고 사치스러워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