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숲에 사는 여우가 친구인 두루미를 생일상에 초대한다. 여우네 집을 찾아온 두루미는 식탁 앞에서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긴 주둥이를 가진 두루미는 납작한 접시에 담긴 수프를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루미 역시 자신의 생일에 여우를 초대한다. 여우 역시 쩔쩔 매는 형편에 이른다. 두루미가 호리병에다가 수프를 담아서 내놓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아는 이솝이야기 중 `여우와 두루미` 의 줄거리다.
정치권에 이따금씩 등장하던 국회의원 정수 조정 문제를 놓고 여야 정치권이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비례대표의 수를 늘리느냐 줄이느냐,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느냐 마느냐가 핵심논란이다. 지난 4월 새정연 문재인 대표가 `400명`안(案)을 꺼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데 이어, 7월 들어 혁신위원회가 `369명` 의견을 내놓았고, 이종걸 원내대표가 `390명` 견해를 보탰다.
새누리당이 `국회의원 증원 불가` 여론 반향을 등에 업고 `증원론`을 공박하는 사이, 새정연이 증원 주장의 진짜 속내를 털어놓았다. 새정연은 다수결 승부를 통해 100% 권력을 장악하는 현 선거제도의 맹점을 개선하자며 `권역별 비례대표제`이슈를 꺼내들었다. 원칙론적 입장에서, 표의 등가성을 높이고 사표(死票)를 줄이기 위한 제도혁신 문제는 `지역대결 구도 타파`의제와 맞물려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새정연의 의원정수 증원 견해는 결코 고상한 차원에서 나온 제안이 아니다. 국회 입법조사처 김종갑 입법조사관이 2012년 19대 총선결과를 토대로 시뮬레이션(모의실험)을 해본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문재인 대표의 소신대로 `독일 정당명부식 비례대표` 방식을 대입할 때 새누리당의 의석수(172석)는 과반(185석)에 한참 미달하고, 새정연은 영남권에서 21석이 늘어나며(143석), 해산된 통진당은 원내교섭단체(20석)가 되는 등 여소야대(與小野大)로 뒤집히는 것으로 나온다.
미국 출장 중이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지역구 의원 수가 늘더라도 비례대표를 줄여서 지금의 300석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 당의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맞불을 놓았다. 이에 대해 김상곤 새정연 혁신위원장은 “김 대표의 발언은 현재 기득권 구조를 고착화해 장기집권을 획책하기 위한 음모”라고 맹비판하고 나섰다. 꿍꿍이 계산서 숨겨놓고 명분발림만 하던 양 진영이 모름지기 다 까놓고 한 판을 벌일 기세인 것이다. 야당의 `비례대표 증원`견해가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우선 비례대표 제도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이 먼저 입증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 국회의 비례대표 역사는 초라하다. `비례대표` 순번이 공천장사의 `딱지`노릇을 해왔던 참괴한 기록은 생략하더라도, 일부 비례대표 의원들이 차기 지역구 공천을 목표로 자행해온 온갖 눈꼴 신 행동들을 국민들은 낱낱이 기억한다.
19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 52명 중 20대 총선 지역구 출마의사를 밝힌 의원은 75.0%인 39명이라는 조사결과가 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 보니 국회 출석률마저 뚝 떨어졌다는 집계도 나돈다. 계층과 직군을 대변하고 전문성을 높인다는 취지는 사라지고, 소속정당의 저격수노릇을 하면서 주야장천 지역구나 노리는 지금까지의 다수 비례대표 의원들의 행태를 그냥 둔 채로 `확대`부터 논하는 것은 결코 혁신이 아니다.
이솝우화 `여우와 두루미`는 상대방의 조건과 처지를 배려하지 않는 언행에 대한 경계(警戒)가 따끔하게 들어있는 명작이다. 현실을 무시한 채 상대방이 먹지 못할 밥상들을 차려놓고 `영양가`가 어쩌고 `맛`이 어쩌고 하는 최근의 정치논쟁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개처럼, `빨대로 먹으면 되지 않느냐`, `접시를 들어 기울여서 먹으면 되지 않느냐`하는 궤변까지 수두룩 쏟아져 난장판이 될텐데…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