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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에 대한 기억

등록일 2015-07-17 02:01 게재일 2015-07-1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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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민건대구대 교수·영어교육과
최근 가루커피를 타고 무심히 수저통에서 제일 작은 것이라고 뽑아들어 커피를 젓고 있는데 가만 보니 아이 밥숟가락이다. 그 숟가락으로 일부러 앓던 버릇처럼 커피를 홀짝 떠 삼킨다. `단가 쓴가`잠시의 생각으로 가슴이 뻐근하다 빈집에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창문 사이로 부유하는 먼지가 왈츠를 추듯 발치 와 있는 햇빛을 받는다.

1980년대를 관통하여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커피와 다방은 일상의 문화공간이었다.

다방은 커피를 마신다기보다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혹은 기다리는 공간이었다. 요즘처럼 휴대전화가 부재하던 시절, 다방은 그 어떤 곳보다도 사람 냄새가 짙은 누군가의 사연을 기다리는 사람사이에 감동을 느끼는 공간이기도 했다.

말과 언어가 참으로 가벼운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이 시대의 소통은 이제 무수히 주고받는 이메일과 휴대전화로 바뀌고 있다. 아침의 일상은 무심코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보내고 받고, 휴대전화를 걸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일로 시작된다. 소통을 통한 무수한 이야기와 논쟁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그만큼 비례하여 진정한 의사소통은 막히고 있다. 자기 말이 무성한 시대, 자기 사상이 옳음을 주장하는 언어의 유아론이 넘치는 공간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소통의 불임시대(不姙時代)를 겪고 있다.

올 봄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가까운 사람으로 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주소지가 바뀌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봉투 겉면에 직접 쓴 보금자리를 새로이 튼 그 주소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글씨체만큼이나 그 동네가 따뜻해 보인다. 나와의 인연을 기억하며 그가 단정한 필체로 써 내려간 편지를 읽으며 가슴이 멍해진다. 그의 일상을 알리는 세세한 소식들이, 이메일과 문자메시지가 대세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오히려 기계적 소통과는 다른 인간의 감동과 아름다운 소통을 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글을 쓴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시인 김수영은 글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글쓰기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말이 가벼운 시대라 하여 몸이 가벼운 시대가 될 수는 없다. 나는 몸의 진지한 접촉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사소통을 꿈꾼다. 선배에게서 받은 그날의 편지는 나에게 몸으로 소통을 전해준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 매혹적인 글이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 그리고 이메일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글쓰기와 소통은 편리함과 속도감으로 무장한 채 무서운 속도로 여기저기를 파고든다. 그 속도감 속에 말과 글은 파편화되고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른 이의 집단을 가르며 서로에게 그루터기만을 남긴 채 진정한 공감을 틀어막고 기계적인 손놀림만을 반복하고 있다.

소통을 위장한 정보제공은 인터넷상에서 쓰레기 부스러기처럼 부유하고 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진지함은 없다. 오직 이 시대의 다양성을 핑계로 집단적 유행과 생각 없이 짜깁기한 글만이 무성하다. 인터넷이, 스마트폰이, 아이패드가, 인증샷이 소통의 원활함을 막고 개인의 사생활만을 들춰내는 것도, 그 기계의 적응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내가 사는 집이 기계의 정보를 통해 설거지를 하다 사금파리처럼 금이 간 그릇하나까지 다 볼 수 있다면 이런 시대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진다.

오늘은 봄을 밀어내는 야생화의 향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편지를 쓰고, 봉투를 준비하여, 풀칠을 하고, 우표를 붙여, 이사 간 동네의 빨간 우체통을 찾아 헤매었을 그 선배에게 답장부터 길게 쓰는 것으로, 소통의 부재한 만큼 다가오는 불임시대의 속도감과 편리함으로부터 멀어지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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