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후배 기자의 결혼을 축하해 주러 예식장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례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은 채 예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결혼식 진행도 주례 선생님이 아니라 친구로 보이는 젊은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이어졌다. 결혼식이 있겠다는 사회자의 안내말이 있은 후 곧 바로 신랑이 입장하고, 아버지의 손을 잡은 신부가 입장하면서 본격적인 결혼예식이 시작됐다. 이어 신랑 신부 두 사람은 미리 준비한 종지쪽지에 깨알같이 적은,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해 열심히 잘 살겠다`는 요지의 결혼서약을 번갈아 읽어내렸다. 그 뒤 신랑 친구들의 축가, 그리고 신랑 신부 부모에 대한 인사, 축하 케익절단이 있은 후 신랑신부가 부부로서 새 삶을 향해 씩씩하게 행진하는 것을 끝으로 결혼예식이 모두 끝났다. 결혼식 말미에 신부가 다음에 결혼할 예정인 친구에게 부케를 던지는 풍경도 사라졌다.
예전과는 너무 많이 달라진 광경에 당황했던 나는 신랑과 비슷한 연배의 하객에게 “요즘 혼례가 모두 이런 식이냐?”고 물었더니 “요즘 결혼식에서는 주례 선생님이 없는 경우가 많고, 신랑신부가 손을 잡고 함께 입장하거나 신랑이나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결혼식 풍속도가 많이 달라졌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결혼식을 하려면 제일 먼저 지역사회에 명망이 있거나 신랑신부와 특별한 관계(주로 사제관계)에 있는 분을 주례로 섭외하는 것이 큰 일이었는 데, 주례가 없으니 혼인준비는 쉬워진 듯 했다. 또 도덕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주례사를 바쁜 주말 결혼식장에서 20~30분씩 듣는 것이 내게도 그리 달갑지는 않았기에 `노(NO)주례`결혼식이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신랑 신부가 함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데 대해서는 아직까지 신부를 시집보낸다는 의미가 강한 결혼식에서 장인이 신부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주는 절차의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시집보내야 할 딸 둘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머지않아 고이 키운 딸들을 시집보내야 할 처지이니 말이다.
결혼식 풍속도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듯 하다. 내가 어릴 때는 흔히 사모 관대 차림의 신랑이 조랑말을 타고 신부의 집으로 가서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쓴 신부와 마주 서서 결혼식을 치렀다. 그러나 전통 결혼식은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필자가 결혼할 즈음에는 거의 사라지는 추세였다. 그래서 또래들은 대다수 예식장이나 관공서의 강당, 마을 회관 등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올렸다.
나도 27년전인 1988년 결혼할 때 전통혼례가 아닌 간소한 서양식 결혼식을 치렀다. 주례로는 통상 은사를 모시는 경우가 많았지만 첫 직장으로 영남일보사에 입사해 신문기자로서 생활을 막 시작했던 나는 평소 언론통폐합의 시련을 딛고 신문을 복간한 뒤 언론인으로서의 소명을 강조해 온 고(故) 이재필 당시 사장님을 존경했기에 무작정 사장실로 찾아가 “주례로 모셔서 덕담을 듣고 싶다”며 졸랐다. 처음엔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며 난감해하시던 사장님은 어렵게 주례를 허락하셨다. 결혼식 당일 이 사장님은 주례사를 통해 “평생 처음 주례를 부탁받고 고민했으나, `첫 월급봉투를 얼마전 돌아가신 어머님 산소앞에 놓고 울었다`는 김 기자의 효심에 감동해 주례를 맡게됐다”고 사연을 소개하는 바람에 울컥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혼식은 타인으로 살던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어 함께 사는 것을 서약하는 의식이다. 결혼식의 겉모습이 어떻게 바뀌든 그런 뜻을 잘 살린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생각한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새롭게 부부로 탄생하는 신랑신부들이 모두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