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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때 잘해”

등록일 2015-05-15 02:01 게재일 2015-05-1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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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 편집국장

5월 가정의 달은 어린이날에 이어 어버이날, 그리고 스승의 날이 이어진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한 말처럼 임금과 스승과 부모의 은혜는 다 같다고 했으니, 스승과 부모의 은혜를 잊어선 안될 것이다. 더구나 어버이는 우리를 키워준 부모이자 밥상머리 교육으로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지난 8일 어버이날, 모처럼 누님 가족들과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올 한해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정담을 나눴다. 아버님은 손자 손녀들이 모두 모이지는 못했지만 딸과 아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당신을 챙기는 모습만으로도 좋으셨나보다. 어버이날 다음 날 아침에는 아버님과 함께 팔공산온천을 찾았다. “등 밀어줄 아들 하나 없어서야 되겠냐”는 독려에 딸 둘로 그치려 했던 가족계획을 바꿔 막내 아들을 낳았던 내 처지에 아버님과 함께 목욕하는 일은 중요 행사일 수 밖에 없다. 한 주는 서울 집에서, 한 주는 포항에서 지내는 주말부부로서 매월 한번 대구에 계시는 아버님과 목욕을 다니는 것 조차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지만 빠지지 않으려 애를 쓰고있다. 그래야 팔순을 넘어 미수(米壽)로 나아가는 연세가 되신 아버님의 건강을 챙길 수 있으리란 심산때문이다. 직장과 아이들 교육때문에 고향인 대구를 떠난 마당이라 이렇듯 가정의 달만 되면 황망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돌이켜 보건대 어린 시절 아버님은 유독 이 아들에게 엄친(嚴親)이셨다. 사소한 잘못에도 회초리나 군대식 체벌로 혼냈다. 온화하기 보다는 항상 엄한 표정으로 아들을 대하셨다. 아버님의 그런 태도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걸 커서야 알게됐다. 평안북도 정주군이 고향이었던 아버님은 6·25전쟁 때 인민군으로 남한에 내려왔다가 국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돼 대구에 정착한, 기구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에서 홀로 자리를 잡느라 힘들게 살아오셨으니 무슨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랴. 그러니 험한 세상 살아갈 수 있도록 자녀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고 하셨다. 어떻든 어린 시절의 내게 아버님은 그저 어렵고 무서운 분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결혼해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상당기간 아버님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다. “어린 아들에게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컸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소파에 누워 TV로 영화를 보고있던 내게 집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아들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인색해요? 아들이 좋아하는 농구도 하고, 목욕도 함께 다니도록 해요. 그러면서 학교 공부는 어떻게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얘기도 들어주고, 조언도 해주고요.”사실 아버님은 어린 내게 야구글러브를 사주며 공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셨고, 배드민턴과 탁구도 가르쳐주셨다. 아이들과 싸워 울고 들어온 다음날에는 태권도 도장에 데려다주시면서 `자기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당부하신 일도 떠올랐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아들에게 무심한 내가 누구를 원망하나`하고 반성하게 됐다. 아버님은 내가 막내아들에게 해 준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셨고,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그런 아버님을 잠시라도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던 게 부끄러웠다. 이제는 연로하신 아버님을 어떻게 하면 오래도록 건강하게 잘 모실까 하는 생각 뿐이다. 요즘 스마트폰 매력에 흠뻑 빠진 아버님은 얼마전 연습삼아 누님에게 카톡으로 이런 메시지를 보내셨다고 했다. “있을 때 잘해!”이 말이 가슴을 울린다.

짧은 봄처럼 아쉬운 삶에 대해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진달래가 피었다가 지고, 목련이 피었다가 지고, 철쭉이 피었다가 지고, 사람이 피었다가 지고….`내게 큰 은혜를 베푼 아버님과 스승님들이 `지기전에` 존경과 사랑을 다해 잘 모셔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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