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다보면 호불호(好不好)에도 변화가 생겨난다. 계절에 대한 선호가 그렇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혈기 방장(方壯)했던 시절엔 여름이 제일 좋았다. 성장과 부패(腐敗)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드러나는 열렬한 생장과 타락의 계절. 불혹(不惑) 무렵에는 겨울의 싸늘한 냉기(氣)와 거기서 발원하는 처연함 같은 게 좋았다.
인생 최종 3막이 시작됨을 느끼는 나이. 요즘 나를 매혹(魅惑)하는 계절은 봄이다. 허름한 농가주택으로 이사한 뒤로 봄에 대한 예찬은 날로 더 깊어진다.
삼월부터 찾아오는 봄의 전령(傳令)이 화사한 색깔로 마당을 수놓고 나면 진짜 봄이 온다. 나는 그것을 초목의 봉기(蜂起)라 부른다. 마당에는 내가 바라지 않은 풀들로 그득하다. 나는 그들에게 `불원초(不願草)`란 이름을 붙여준다.
사람들이 말하는 잡초(雜草)에 대응(對應)해서 내가 생각해낸 신조어(新造語)가`불원초`다. 세상에 잡스러운 풀이 있는가?! 인간이 쓸모를 기준(基準)으로 삼아서 잡초라고 규정하는 것에 나는 동의(同意)하지 않는다. 잡초들의 눈으로 볼 때 쓸모 있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나는 언제나 그런 문제(問題)에 대한 대답을 `불원초`들에게 물었으나, 녀석들은 빙그레 웃을 뿐 시원스런 대답(對答)을 해주지 않는다.
`불원초`가 마당 곳곳을 해방군처럼 점령(占領)하고 나면 가까운 논에서 개구리들의 합창소리 들려온다. 낮이고 밤이고 영상 20도의 기온은 나로 하여금 이층 베란다로 나가도록 한다. 온 누리의 뭇 생명이 잠에 빠져드는 한밤중에 슬며시 베란다 의자에 앉아 상념(想念)에 젖어드는 기쁨은 뭐라 형언(形言)하기 어렵다.
작년 2월 무렵 통독(通讀)한 `레 미제라블`의 미리엘 주교를 떠올리는 즐거움으로 오월의 밤을 보냈더랬다. 주교관 뜰을 서성대면서 밤마다 천상(天上)의 하느님과 대면했던 미리엘 주교. 위대한 신성의 확인과 유한한 인간의 미소(微小)함으로 괴로워했던 미리엘. 그가 장발장에게 내준 촛대는 주인공을 어떤 길로 인도했던가?!
하지만 `레 미제라블`에서 나는 예술원 회원이 아닌 학술원 회원 위고의 신랄(辛辣)한 지적에 몇 번이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153년 전에 주장한 무상교육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1862년에 출간된 `레 미제라블`에서 위고는 당당하게 말한다. “무상(無償)으로 교육하지 않는 사회는 야만(野蠻)이다!” 오늘날 유럽의 대표적인 교육 강국, 그러니까 프랑스와 도이칠란트, 핀란드의 무상교육 이념의 주춧돌을 놓은 이가 빅토르 위고인 셈이다.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오월의 아름다운 밤에 생각한다. 왜 우리는 무상교육을 하지 못하는가?! 왜 무상급식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가?! 프랑스와 도이칠란트처럼 요람(搖籃)에서 무덤까지 모든 교육을 왜 무상으로 실행하지 못하는가?! 국가가 시민들에게 베풀어야 할 최소한도의 도리 가운데 하나가 무상교육 아닌가?!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무상으로 대학원 교육까지 국가가 책임지면 아니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재원(財源)을 걱정한다. 전임(前任) 정권에서 환율(換率) 강제 조작(操作)으로 170조 이상의 부자감세를 강행(强行)했고, 이른바 `사자방 (4대강, 자원외교, 방위산업) 비리(非理)`로 나라 체면(體面)이 말이 아니다. 그런 천문학적인 비용을 재벌(財閥)들에게 퍼주지 않고, 정상적인 국정운영으로 똥별들의 행악질을 막아내고, 예산을 절감(節減)한다면 무상교육은 결코 강 건너 등불이 아니다!
막힌 봄날이 시나브로 여름을 향해 매진(邁進)하는 시점에 나라의 안위(安危)와 민초들의 허덕허덕한 삶을 생각한다. 미리엘 주교처럼 천상과 교감(交感)하는 지상의 영혼은 아니지만, 이 나라에 거주하는 우울하고 힘없는 민초들의 근심걱정이 덜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밤 나는 베란다에서 오월의 밤과 다시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