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년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파 명현(名賢) 70여 명이 사사(賜死)된 끔찍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 하나에서 시작됐다. 폭군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조선 11대 왕 중종(中宗)은 개혁사상가 조광조 등 사림파 신진사류를 국정에 중용한다. 사림파는 각종 개혁안과 함께 반정 과정에서 공을 세운 적이 없는 일부 훈구파 사대부들의 공훈 삭제를 주장해 파장을 일으켰다.
위기의식을 느낀 훈구파의 중심 홍경주(洪景舟)는 자신의 딸인 희빈 홍 씨와 짜고, 나뭇잎에 꿀로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인 네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다. 반정으로 왕좌에 오른 중종의 트라우마를 정확하게 겨냥한 술수였다. 궁녀가 가져 온 나뭇잎을 본 왕은 대노하게 되고, 훈구파는 마치 확인사살을 하듯 사림파를 역모로 얽어 낱낱이 고변한다. 권력의 핵심에서 위세를 떨쳐온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 이상주의자들은 처참하게 무너진다.
`성완종 리스트`로 시작된 정치권의 혼란이 좀처럼 갈피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끊임없는 `네 탓` 공방의 와중에 리스트에 오른 일부 인사들은 쓰잘 데 없는 자충수로 자살골을 넣고 있는 양상이다. 홍준표 경남지사의 말처럼 `올무`에 걸린 신세들이 무리한 몸부림으로 스스로 목줄을 죄고 있다는 혹평까지 나온다. 이래저래, 해외순방에서 돌아온 박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부질없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완구 총리에서부터 김기춘 전 청와대비서실장, 홍문종 의원 등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의 대응이 좀 더 달랐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운 대목이 있다. 이완구 총리의 경우, 애초 “(성 전 회장과) 소원하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년 반 사이 23차례나 만난 것으로 적혀 있는 성 전 회장의 다이어리가 발견되면서 이 총리의 패는 형편없이 꼬이기 시작했다.
선거사무소에 들러 현금 3천만 원을 전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금방 드러날 사실관계를 지나치게 부정하다가 의혹을 키웠다. 김기춘 전 청와대비서실장의 경우도 “비서실장이 된 이후로 그를 만난 적도 없다”던 말 한마디가 자승자박의 올무가 되어버렸다. 사건이 진실게임 양상으로 전개될 경우, 대중들의 판단 추(錘)는 거짓말쟁이에게 무조건 불리하게 기운다. `내일 밝혀지더라도 오늘은 부인하라`는 한국 정치판의 생존금언이 무색해진 판국이다.
비겁한 오리발들이 난무하고 있다. 검찰의 수사를 `표적사정`으로 인식한 고인은 이 나라 정치권 한복판에 친박 핵심들만을 노린 `표적리스트` 폭탄을 투척하고 사라져갔다. 느닷없이 이름 적혀 공개된 사람들은 악착같이 손사래를 친다. 고인이 오랜 세월 여야 정·관계 사방팔방에 로비를 해온 것이 명약관화한 마당에 여당 정치인들은 자기 이름이 나올까 전전긍긍이고, 야당 정치인들은 수사확대를 `물 타기`라며 극구 비난한다.
문제의 핵심은 고인으로부터 부적절한 금품을 받았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성완종 리스트`가 나왔을 때 “자주 만났다”고 인정하고 “잘 안다”고 고백하고 “그러나 금품을 수수한 적은 결단코 없다”고 주장했다면 사태가 이처럼 험악하게 전개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불법 정치자금 문제가 나올 적마다 일순 온 나라가 `오리발 공화국`이 되어 국민들의 실망과 고통을 덧내는 이 참담한 노릇을 언제까지 참고 보아야 할 것인가.
박 대통령에게 이제 퇴로는 없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그나마 기회를 아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정도(正道)로 가야 한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용단도 필요할 것이다. 썩은 물이 질퍽한 정치권 시궁창을 어떻게 하면 1급수 맑은 도랑으로 뒤집어낼 것인가를 숙고해야 한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따위의 수작질이 가능하지 않은 세상에서 더 이상 용서해도 괜찮은 위계(僞計)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