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의 폐해가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근래에 와서 인재의 임용이 당목(黨目)에 들어있는 사람만으로 이루어지니, 이러한 상태가 그치지 않는다면 조정에 벼슬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그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헤아려 이조(吏曹)가 탕평의 정신으로 수용하도록 하라.” 조선 21대 왕 영조가 즉위하자마자 내린 탕평의 교서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노론(論) 세력과 혁명을 꿈꾸던 소론(少論) 세력 모두의 야욕을 꽁꽁 묶었다.
선왕 경종에 대한 독살설까지 퍼져 정국이 뒤숭숭하던 위태로운 상황에서 영조의 탕평 교서는 회심의 일격이었다. 영조는 자신의 등극으로 노론 천하가 되리라던 모든 예측을 깨고 소론 거두 이광좌(李光佐)를 중용하는 등 의외의 인물들을 기용했다. 등극 4년차에 전국의 소인과 남인 세력이 조직을 규합하여 일으킨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노론이 아닌 소론 세력으로 막아내는 묘수를 구사하기도 했다. 그 용의주도함은 세월을 넘어 감탄을 자아낸다.
이른 바 `성완종 리스트`사건이 정치권을 뒤덮으면서 정국은 바야흐로 `시계제로`상태다. MB정부 기획사정이 단박에 박근혜 정부 `자해사정`으로 반전됐다는 풍자까지 나오고 있다. 4.29 재보선이 닥쳐오면서 여당은 전전긍긍이고, 야당은 연일 `심판론`에 불을 댕기며 부채질에 열심이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은 여파를 길게 끌어갈 조짐이고, 검찰수사 또는 새로운 폭로의 유탄이 어디로 튈지 가늠조차 안 되는 형편이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 속에서 가장 난감한 쪽은 아무래도 청와대가 아닐까 싶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래 단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시간을 견뎌왔다. 취임초 인사문제로 인한 혼란이 끊이지 않더니, 숨을 좀 돌릴 만하니까 `세월호 침몰`이라는 대참사가 터졌다. 대형 참변의 여진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근근이 집권 2기 집행부를 꾸려 새 출발을 시작한 찰나에 또다시 `성완종 리스트`라는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의 `불운`을 말한다. 오비이락이든 뭐든 좀 제대로 달려갈 만하면 발목이 콱 잡히고 마는 연속적인 혼란을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을 모두 감안한다고 해도, 박근혜정부가 출범 이후 탕탕평평(蕩蕩平平)하면서 대의를 확대재생산하지 못하고 세력을 오그라뜨린 허물이 자꾸만 되새겨진다. 지독한 불통의 늪에서 대로(大路)를 닦아내지 못한 역정이 정녕 아쉽기만 하다.
`성완종 리스트` 사태를 만난 정치권은 사뭇 당당하지 못하다. 조금이라도 의혹을 받을 처지에 있는 정치인들은 벙어리 냉가슴이고, 다른 의원들도 대개는 행여 `의리 없는 인간` 취급받을까 걱정인 표정이다. 이런저런 눈치 안 보고 모질게 떠드는 사람들은 단골 등장해온 저격수 몇 사람뿐이다. 답답한 것은, 모두가 파당적 시각과 이기적인 가치기준에 갇혀 민심을 정직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맞닥뜨린 대형 악재를 딛고 박근혜정부가 새로운 정치지평을 열어갈 묘책은 무엇일까.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맑은 판단을 올바로 읽고 그 뜻을 받드는 길밖에 없다. 국민들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정치개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싶어 한다. 고 성완종 회장이 죽음 길에서 이를 갈며 남긴 메모지를 살생부로 놓고 사정(査正)을 한정하는 것은 결코 바른길이 아니다. 시작은 그렇게 하되, 예외를 두지 말고 제대로 해야 한다.
박근혜정부로서는 고해성사하고, 성역 없는 수사를 보장해 읍참마속(泣斬馬謖)하고, 철두철미한 정치개혁을 단행하는 중대결단 밖에 없다. 친박이 어쩌고, 친이가 어쩌고 하는 소아병적인 붕당의식부터 버려야 한다. 탕탕평평(蕩蕩平平)의 감격은 아직 시효가 남아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은 정치구조 개혁을 하라는 하늘의 계시”라는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의 말에 공감한다. 위기는 곧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