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한 주를 위하여 휴식이 필요한 일요일 밤, 그래서 대부분 일찌감치 자리에 눕거나 편한 자세로 TV를 본다. 문명의 이기 리모컨이 손안에 있으므로 굳이 인내할 필요 없이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다보면 공중파 방송의 인기 프로그램 `개그콘서트`를 만날 수 있다. 아이들은 열광하였으나 가벼운 말장난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관계로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어서 애꿎은 리모컨만 바쁘다가 문득 `불편한 진실`이란 코너에 아이들 말로 필이 꽂힌 적이 있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젊고 잘 생긴 개그맨이 능청스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왜 이러는 걸까요”라 말하면 절로 웃음이 터진다.
불편한 진실은 미국 부통령을 지낸 엘 고어의 1천회가 넘는 강연을 바탕으로 엮은 지구환경 리포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산화탄소 증가 등으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지구와 인류를 어떻게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짚었으며, 이 내용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여 무분별한 인류에게 경고장을 내 민 무거운 내용인데, 역설적으로 가볍고 유쾌해야 할 개그의 소재가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을 관통해 온 갈등은 전통적 유교 방식의 보수적인 가정환경의 영향으로 분방한 자유로움을 갈망하였으나 현실규범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강박이었다. 예술가를 꿈꾸는 자가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것 등 나를 둘러 싼 환경들은 모든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고, 그것을 풀어내는 일이 결국 내 인생의 과제가 되었다.
저만치 인생의 황혼을 앞에 두고 밀려오는 회한은 성취감과 안도감이 아니라 내가 그리는 그림이 과연 이 시대의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 경력만 많아진 교직에서 나는 과연 미술교사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쓸쓸함이다.
지금껏 내가 해 온 예술행위란 것이 이미 100년도 더 지난 옛날에 빛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인상주의 작가들보다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 고향에 대한 애정과 열망으로 버텨온 지역문화, 지역예술을 위한 활동은 이상과 현실이라는 극과 극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초래하며 쓰러지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근근히 이어가고 있음 또한 알량한 사명감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은 선택과 관계없이 생존이었으며 학교라는 현장에서 쏟아지는 업무와 수업으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 하고도 무거운 책임감 외엔 언제나 내 마음은 예술을 향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로서 교사로서 나의 불편한 진실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가를 위대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모방자가 아니고 완전한 창조자이기 때문이며, 교육의 위대함은 지식의 전달보다 스승의 가치관이 사표가 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들어선 지 벌써 30여년이 되었고, 미술교육 또한 해체하는 모더니즘을 지나 다시 통합하는 포스트모던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었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 배웠던 미술과 40여년이 지나 내가 가르치는 미술과는 형식이 달라졌을 뿐 내용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필요와 조건이 바뀌었는데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그 문화는 정체되고 만다. 그러므로 시대성의 탐구는 예술가로서 교사로서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다. 오늘날의 의학이 사라져가는 질병을 연구하기보다 새롭게 나타나는 바이러스에 대응하듯 예술과 교육도 그 시대의 조건에 대응해야 한다.
무엇을 그리느냐? 무엇을 가르치느냐?
결국은 부단한 성찰을 통하여 예술과 교육활동에서 싱싱한 작품과 싱싱한 수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 이 또한 훗날 불편한 진실로 남게 될지 모른다는 씁쓸한 생각을 하며 내 인생이 어디쯤에 있는지 그 현주소를 짚어 본다.
봄이다. 대지를 흔들어 움트는 생명들도 작년과 올해가 다를 것이다. 자연도 매순간 새롭고 다른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거늘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예술가는, 교육자는 어떠해야 할까요?
모처럼 개그콘서트를 봐야겠다. “왜 이러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