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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어항` 다시 보기

등록일 2015-04-14 02:01 게재일 2015-04-1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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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휘 서울본부장

“인간 개개인은 얼마든지 도덕적일 수 있어도 그런 개인들이 모여 집단이 되면 전혀 다른 특성, 즉 집단으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논리와 생리를 갖게 됨으로써 사회는 비도덕적이 된다.” 미국의 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는 1932년에 출간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니부어는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 팽배해있던, 나른한 낙관주의에 도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치권에 전대미문의 `성완종 리스트` 핵폭탄이 터졌다. 자원외교 비리의 요인(要人)으로 떠올라 검찰수사 그물에 단단히 얽혀들어 쩔쩔매던 그는 구명(救命)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선택하고 말았다. 북한산에서 목을 맨 그가 죽기 직전 모 언론사 부장과 주고받았다는 50여 분간의 통화내역과, 주머니에 남긴 메모지 한 장이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의 메모는 박근혜 대통령 핵심 친박 정치인들을 집중적으로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부정한 금품수수를 둘러싼 정치권의 `리스트` 파동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민심을 허탈의 늪으로 밀어 넣는 이 같은 추태만상에 국민들은 넌더리가 나 있다. 정치권 안팎에는 벌써부터, 리스트 내용의 진위여부를 비롯하여 `카더라` 뜬소문이 태산처럼 쌓이고 있다. 고인이 생전에 무려 150여명의 정치인들에게 150억 원 이상의 금품을 제공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어딘가에 그 목록이 시퍼렇게 살아있으리라는 추측도 나돈다.

꽤 많은 정치인들이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으리라는 짐작도 있다. 성 전 회장이 주머니 속에 남긴 마지막 메모지에는 구명호소를 외면한 유력 정치인들에 대한 원망과 한이 서려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중퇴의 학력으로 일평생 용의주도한 처세술을 발휘해 큰 기업을 일궈낸 그가 남긴 종이쪽지 한 장에 휘둘려, 한 순간 허청거리는 우리 정치권의 연약한 군상이 초라하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은 우리 정치권이 여전히 `비정상`의 그늘에서 온존하고 있음을 의심케 한다. 그간 불법 정치자금에 정치생명을 의탁하다가 수상한 타협 한 번으로 정계를 아주 떠난 인물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온당치 못한 자금거래로 법정에 섰던 여러 정치인들이 불사조처럼 정치적 사면을 받고 다시 정치일선에서 활약하고 있기도 하다.

정치권 혼탁에 대한 논란이 있을 적마다 `물갈이론`이 떠오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공천혁명이네, 선거혁명이네 하면서 변화를 외쳐왔고, 실질적으로 정치권에 새 인물들이 다수 영입된 것도 사실이다. 안타까운 일은, 돌아보면 기대한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동안 혹시 혼탁한 어항의 물은 그냥 둔 채로 애꿎은 금붕어들만 자꾸 갈아댄 어리석음을 범한 것은 아닐까.

우리 정치권이, 아니 우리 사회가 여전히 부정부패가 들춰져 남우세를 당한 범법자에 대해 `잘못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재수 없이 걸려든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한, 누군가가 `리스트`에 이름 석 자가 올라 완전히 망가지는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항의 썩은 물을 갈기 위한 노력을 등한히 한 일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드러난 비리부정을 도려내는 일만으로는 제대로 된 물갈이가 될 수 없다는 진실이 증명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악마는 `쾌락`을 팔고, 천사는 `행복`을 판다는 말이 있다. 금품이라는 달콤한 유혹과의 음험한 악수 한 번으로 인생을 망치고,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참상일랑 제발 좀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 니부어는 “정의를 위한 인간의 능력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불의를 향하는 인간의 성향은 민주주의를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한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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