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에 필자의 은사님이신 김태신 선생님께서 93세의 일기로 열반(스님)하셨다. 84년 맥향화랑 개인전 때 오셔서 이제는 채색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첫 대면이 지금까지 영원한 스승으로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 86년 이른 봄, 당시 맥향화랑 (故)김태수 사장님의 소개로 서울 인사동 운당여관에 찾아가서 큰절을 하고 건삼 두통을 내어놓고 얼른 나오려 했다. 방안에는 내노라 하는 대가들이 빙 둘러 앉아 처음 보는 낯선 청년의 등장에 호기심으로 지켜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날이 저물기도 하고 분위기에 부끄럽기도 하고 해서 대구로 내려 갈 참이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날이 저무니 자고가라 하시니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손님을 물리치고서는 이왕 왔으니 인삼 두통 값은 배우고 가라하신다. 그리고 손수 이부자리를 펼쳐주시고 자라고 하시며 “낳은 아들은 미우나 고우나 영원한 아들이지만 가르치는 아들(제자)은 책임을 져야한다”하시며, 그래서 일본에서도 제자가 없고 이우환이 배우려는 것도 마다했다고 하셨다. 또한 서울의 유명한 동양화교수가 아들을 부탁해도 거절하셨다. 그런 분이 하룻밤을 자고나니 다음에 한국에 오면 또 보자고 하셨다. 그리고는 일본에서 오실적마다 채색을 배워 주시고 재료학을 가르쳐 주셨다. 심지어 제자를 위해 채색물감을 직접 일본에서 구입하여 오셨다.
선생님께서는 앉으나 서나 심지어 이부자리 밑에서도 그림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어머니(김일엽 스님)이야기, 한국화단의 대가들과의 교류, 일본 활동, 특히 개인전 지원 등의 이야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심지어 당대의 최고화가들의 채색사용, 재료를 구입하고 일본 내 개인전을 열게 해 주신 내용 등은 필자에게도 교훈이 되었다.
선생님은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의 개화여성 사이에 태어나신 분이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한국을 드나들고 하신 것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유하신 분들도 한 결 같이 한국현대미술의 중심에 있는 분들이 많다. 이당 김은호 화백의 양아들로 입문하시면서 그림을 배우고 이응노, 나혜석, 김기창, 장욱진, 고석봉, 천경자, 안동숙 등 현대미술사의 중심인물들과 친분을 갖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채색화에 대한 영향은 얼마나 될까?
어떤 분은 일본의 개인전을 열어드리고, 또 어떤 분에게는 채색의 특별한 기법을 전수하셨다. 물론 제자로서가 아니라 동료 선후배로서 답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과 그렇게 교류하신 분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서신 분들이다. 누구도 외국 유명화랑개인전이 매우 어렵지만 그 당시에는 해외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함에도 대부분 초대전으로 도쿄에서 열리도록 도와주심은 대단함이 묻어있다. 그렇다고 그 고마움을 공개하며 일본인 은사님과의 유대를 내세우지도 못한 시대였다.
특히 채색화를 일본화라고 치부하던 시대이기에 더욱 선생님과의 관계를 과시(?)하지 못했다. 필자의 채색화 작품 역시 대구의 미대 동양화교수들의 표적이 되었다.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채색화는 화단전체에 번져 채색의 물결을 이루게 되었다.
그 영향의 뿌리는 역시 필자의 스승 김태신 선생님이시다.
그리고 언젠가는 선생님의 화단야사, 채색화에 대한 가르치심을 정리 해 보아야겠다.
힘들과 아프고 엇갈려 만남이 오래오래 되어도 만나면 늘 훈훈하게 해주시며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 알면서도 속으며 이웃사랑과 배품을 실천하신 선생님, 그러한 선생님께서 단 하나의 제자로 거두어 주심에 “선생님 가르침의 영원한 아들”로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