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교육대학원 학생들에게 서양화 강의를 하면서 예술가의 길과 교직을 동시에 꿈꾸고 있을지도 모를 수강생들에게 질문하였다. 20대 청년들과 일종의 소통 과정이었는데 “여러분은 혹시 내가 부러운 부분이 있나요?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런 질문을 한 까닭은 어느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나 여전히 삶의 여정은 고달프고 뚜렷이 이룬 것도 없이 몸도 마음도 늙었다는 쓸쓸함으로 이제 사회로 나가는 그들의 젊음과 밝은 기운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의외로 나를 부러워했다.“결혼도 하셨구요. 자식들도 장성하였구요. 직장도 있으시구요. 어쨌든 교직에 있으면서 작가도 되셨구요….”
나의 처지를 탄식하는 의미로 한 질문이었는데 예기치 못한 답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직 결혼도 안하였으니 아이도 없을테고, 장성하여 독립해야 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아직은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저 치열한 임용고시가 엄청난 부담일테고,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었을텐데 그림은커녕 우선 당장 스스로 먹고 살 일도 해결하지 못하였으니 생각 있는 자의 사고와 판단으론 참으로 막막하기도 하겠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들은 거의 비슷한 입장이며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 마다 선물을 받는 것 같아요. 오늘도 하루라는 선물을 주셨구나. 오늘은 이 하루라는 선물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래서 매일이 궁금하고 매일 재미있어요.” 그 또한 망치에 맞은 것 같은 띵 한 답변이었고, 그 앞에서 나이만 많았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한 부끄러움과 그런 마음을 가진 젊은이에 대한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자신의 마음가짐이라는 당연한 진리에 새삼 숙연함과 기특함, 안타까움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교차되었다.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엔 따뜻한 밥 한 끼가 큰 행복이었고 이젠 먹고 사는 걱정은 어느 정도 해결 된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먹고 살 일이 걱정이라 한다. 먹고 산다는 의미가 달라진 까닭이다.
물질이 풍요로워진 사회! 결국 삶은 물질과 정신의 조화일텐데 혹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정말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 또한 죽어라 일하며 눈에 보이는 이득을 창출이라 생각하는 구시대 유물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시대를 앞 서 가는 예술가이고자 애쓰지만 정작 나의 삶은 나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에 함몰되어 편한 감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것은 되돌아보며 감상에 빠질 새도 없이 다가오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 즉 치열한 생존이다. 인간이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성숙해 가는 과정은 개인적으로는 성장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책임과 의무라 생각 한다.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시대성과 인간성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파문이다. 세상이 나쁘다고 탓하기 전에 함께 발전하고 성장하지 못한 인간적인 미성숙을 부끄러워하고 각성해야 할 일이다.
매일을 선물로 맞이하는 젊은이! 참으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우리 세대의 행복이란 개념은 안락하고 풍족하여 근심 걱정 없는 삶이었으나 그들에게는 갈등이 풀어야 할 대상이며, 시련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위기는 기회의 대상으로 하루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 한 세대 진화 된 인간의 모습이다.
그 겨울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아프리카로 봉사 활동을 떠난 젊은이에게서 메일이 한 통 왔다. 이 시대 멋진 젊은이들에게 존경과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주머니 속에 꼭꼭 숨겨 놓고는 자신도 잃어버리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오늘 하루가 나의 지금까지 인생에서 제일 젊은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젊음을 아낌없이 쓰는 제가 되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군요.ㅜㅜ 돌아가면 무엇을 할까? 어떻게 살까? 걱정이지만 잠시 그 짐은 내려놓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