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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사거리를 지나며

등록일 2015-03-11 02:01 게재일 2015-03-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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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현 편집부국장

포항에 살면서 북구의 창포사거리를 지날 때 마음이 불편한 적이 많았다. 도로를 중간에 두고 서로 동·서편에서 마주보고 선 이곳의 아파트에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압축돼 있다. 쭉 뻗은 탑상형의 상위 중산층 거주 아파트와 그 맞은편의 공공임대아파트.`탑`에 사는 이들은 바깥 출입도 드물고, 그나마 차를 타고 다니니 별로 볼 일이 없다.

하지만 건너편의 삶은 거리에 그대로 펼쳐진다. 주민 가운데 소외계층이 많으니 사거리 여기저기서 팔다리에서부터 다운증후군까지 온갖 장애 유형을 볼 수 있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입주하기 시작한 북한이탈주민들도 이제 이곳의 어엿한 주류가 됐다. 단지에 가까워질 수록 대낮부터 취해 있는 쓸쓸한 이들도 흔치 않게 보인다.

어느쯤에서부터인가 이런 삶의 실제가 내 눈과 마음에 비춰지지 않기 시작했다. 쭉 뻗은 도로여서 운전 중 과속차량을 주의해야 하는 곳 정도로 입력 데이터가 바뀐 것일까? 간혹 수입맥주를 싸게 살 수 있는 대기업 소매점이 있는 곳에 불과한 걸까?

그런데 며칠 전 이곳을 지나다가 다시 예전 이 거리의 진면목이 생생히 보이기 시작했다. 봄으로 옮겨가는 계절 외에는 바뀐 것은 없다. 그런데도 그 대형소매점의 계산대에 늘어선, 풍요로운 `탑`주부들의 대열 속에서 마치 유태인 격리거주지인 `게토`를 빠져나온듯 남루한 입성의 건너편 주민들의 표정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내게 어떤 일이 있었나?

그렇다. 나는 요며칠 A.J.크로닌의 책을 읽었다. 고교 시절 처음 읽은지 30여년만에 다시 읽은 소설 `성채`(城砦). 그리고 처음 듣고 역시 그 세월이 지나 읽게된 `천국의 열쇠`가 준 자각의 선물이었다. `성채`는 이제 마흔여덟이 된 그 소년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을 묻는 빈칸을 한결 같이 메우게 해줬지만 늘 미안한 은인과 같았다. 내게 일독을 권하며 빌려준 동네 형에게 책을 돌려주지 않고 간직하다 잃어 버렸던 그 오랜 미안함 만큼이나….

`성채`는 불의에 참지 못하는 정의감 있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휴머니스트 의사가 주인공이다. 그는 초임지인 탄광촌의 조합 소속 의사로서 부조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좌절한 뒤 런던으로 건너가 잘 나가는 `속물 엘리트`로서 한때 부초 같은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남편이 `의협심 있는 청년의사`로 돌아오길 갈망하던 멘토인 아내의 죽음을 전후해 예의 길로 돌아간다. 이 책에 감동한 소년은 한때 의사의 길을 걸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수맹`(數盲)이나 다름 없는`과락`(科落)급 수학 실력에 깨끗이 접었다. 하지만 당시 순수했던 감성에는 시시한 불의를 멀리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바꾸며 올바른 길을 가겠다는 인생의 다짐이 불도장처럼 찍혔다. 내게 이 책이 준 감동은 준 건 크로닌이 전업작가로 나서기 전 의사로서 겪은 바를 소설에 담았기에 더 컸었다. `천국의 열쇠`도 신교와 구교의 갈등 속에서 일찍 인생의 파란을 겪은 크로닌이 20세기 초반 중국 선교에 파견된 치셤신부를 통해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의 화해, 그리고 휴머니즘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지고보니 30여년 만의 이같은 독서 회귀는 절박함의 끝에서 택한 궁여지책이었다. 최근 기자직을 유지하기에 필수불가결한 소명의식이 많이 옅어졌다. 그냥 신문사에 다니는 샐러리맨이 돼가는 느낌이랄까. 이런 슬럼프에 직접적 계기가 있었다. KTX 포항 개통일을 둘러싼 기사 때문이었다. 공무원과 갈등 관계에 놓이더라도 고속열차가 3월 31일이 아닌 4월 2일부터 여객을 수송한다는 정확한 정보 전달의 의도는 엉뚱하게 해석됐다. 심지어 “한 이틀 늦어지면 어떻느냐”는 얘기도 있었는데 이는 포항시가 아닌 `괜히 긁어 부스럼낸다`는, 나를 향한 것이었다. `좋은 것이 좋다`는 지역의 평균주의와 미덕을 당의정처럼 바른 공범강요에 압박을 받는 듯한 지난 몇주였다. 차라리 이럴거면 `호외요 호외`를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니던 신문팔이소년과 기자가 다를 게 뭐 있는가라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다행히 이런 수렁 속에서 나는 한권의 책을 통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아마 앞으로 일생에 한번은 더 읽을 터인데 그때 부디 `성채`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그래서 내게도 또 다른 천국의 문이 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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