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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서정(敍情)

등록일 2015-02-24 02:01 게재일 2015-02-2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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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선애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부

꽤나 긴 설 연휴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 온 월요일 아침이다. 연휴 첫날엔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일이 어색하게 생각되더니만, 며칠 동안 느슨한 차림으로 편안함에 익숙해 있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오히려 출근길이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설을 쇠면서 서로에게 했던 수많은 덕담(德談)들을 떠올리며, 좋은 마음가짐과 선한 행동으로 바람직한 을미년 한 해를 살겠다고 다짐을 하니 이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입춘이 지난 지가 한참이라 그런지 아침 공기가 제법 훈기를 내뿜는 것 같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산뜻해진 것 같고, 겨우내 얼어붙은 땅들도 녹아 질퍽해지고 있고, 추운 겨울을 온 몸으로 버텨낸 나무들의 가지에는 어느덧 새싹이 움트고 있다.

그렇다. 봄은 말없이 오고 있었다. 박재삼 시인은 `無言(무언)으로 오는 봄`이라는 시에서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그 무지무지한/추위를 넘기고/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그것을 그냥/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이 엄청난 비밀을/곰곰이 느껴보게나”라고 했다. 말없음은 말없음으로 읽을 수 있을 뿐, 대자연의 순환 앞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조선조 후기의 가객 안민영이 “어리고 셩근 매화(梅花) 너를 밋지 아녓더니/눈 기약(期約) 능(能)히 직켜 두 세 송이 피엿구나”라고 읊었듯이, 하기사 제주의 이중섭 미술관 정원에 핀 매화는 한라산의 눈바람을 이기고, 지난 1월 말에 이미 봄을 전하지 않았던가.

윤동주 시인은 `봄`이라는 시에서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삼동을 참어온 나는/풀포기처럼 피어난다/즐거운 종달새야”라고 했다. 도시 생활에서 노란 배추꽂과 종달새를 구경하기는 어렵겠지만, 조만간 개나리와 진달래꽃은 볼 수 있을 것 같다. 윤동주 시인은 이 시를 쓰면서 만물의 혈관 속에 시냇물처럼 흘러 생명을 재생시키는 봄의 경로처럼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다시 피어나기를 소망했으리라.

오세영 시인은 `봄`이라는 시에서 “봄은/성숙해가는 소녀의/ 눈빛 속으로 온다/흩날리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봄은/피곤에 지친 춘향이/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눈뜬 저 우수의 이마와/그 아래 부서지는 푸른 해안선//봄은/봄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의/가장 낮은 목소리로 온다/그 황홀한 붕괴, 설레는 침몰/황혼의 깊은 뜨락에 지는 낙화”라고 했다. 앞의 윤동주 시인이 자연에서 봄의 소리를 들은 것과는 달리 오세영 시인은 `소녀, 춘향, 사람` 등 사람에게서 봄을 발견하고 있다. 이처럼 봄은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어 움직이게 하는 힘을 지닌다.

남도민요 중 `봄노래`인 “에야 뒤야 어야 뒤야 봄이 왔네 봄이 왔네 에야 뒤야 봄이 왔네 왔네//먼산에 아지랭이 아른아른거리고 시냇물도 주르르르르 노래한다 춤을 춘다 새들도 짝을 찾아서 봄노래를 부른다 봄노래를 부른다. 봄봄봄봄 봄 봄봄 꽃망울은 방긋 웃고 방실 방실방실 웃음지며 벌나비 잠을 깨고 각시님도 춤을 추네 춤을 추네”를 듣고 있으면, 온 몸이 들썩여진다. 여기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 봄 편을 들으면,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겨울 내내 꼭 닫아 두었던 창문을 열어젖히고,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사무실 또는 집안 정리를 하게 될 것이다.

만물을 약동하게 하는 봄 앞에서, 메마르기 그지없는 우리의 이성 저 너머에 있는 서정을 일깨워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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