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인문학이란 말이 난무하고 있다. 인문학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닌데 왜 지금 이토록 인문학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 사람들이 수많은 정보와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바, 인문학이 그 좌표를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문명이란 업적을 축적해왔고 문명은 인간의 편의에 기여해왔다. 그런데 현대문명은 그 발달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인간정신을 추월해버렸고, 인간과 문명은 마치 주객이 전도된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문명의 사용이 두렵거나 사용방식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숫제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문명화를 강요하여 현대문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과연 인간을 위한 문명인지 문명을 위한 인간인지 혼란스럽다.
지난 30여년을 미술교사로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았고, 예술활동을 삶의 원천으로 믿고 살아온 필자 또한 현대 물질문명과의 괴리로 교단에서나 화단에서 좌표를 잃어 당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교육 현장에서는 이미 노교사가 되어 버린 나는 요즘 아이들과의 소통이 어려울 때가 있으니, 그들이 쓰는 용어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고, 유교적 전통방식의 교육을 받은 내 가치관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일들도 가끔 생긴다. 그것을 내 가치기준으로 판단하여 교육하면 구태의연한 잔소리로 받아들일 것이니 아이들에게 촌(?)스럽게 비쳐질까 염려되어 스스로 머뭇거리기도 하는 지경이다.
예술도 그렇다. 자연을 큰 스승으로 여기고 재료와 대상에 충실하며 개인의 정서와 시대의 아픔을 화면에 은유하려 애쓰던 작업이 과연 이 시대에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뭔가 더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내야 비로소 이 시대의 예술이 아닌가 하는 강박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내 모습이다.
Who am I?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갈등을 하며 살고 있다. 그 속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른다는 것이며, 옳고 그름을 떠나 내 삶 또한 쉬지 않고 흘러서 인생의 종착역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인문학적 특성인 사변적 인간으로 변하고 만다. 현대문명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물질문명에 대한 패배일까, 아니면 현대화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그런 종류의 갈등은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인간들의 화두였었다.
인류 최초의 성문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에도 `요즘 아이들이 영 버릇이 없다`는 기록이 있다니 인류의 현재 모습은 늘 그랬던가 보다. 세상에는 언제나 노인이 있고 젊은이가 있고 어린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성장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데, 시간에 맞추어 성숙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어른이 되었을 때의 나는 이전 시대의 어른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의 어른으로 진화하고 성숙하여야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어른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현대는 각종 유형의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문명은 우리를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았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것은 인간의 잘못이지 문명의 탓이 아닐 수 있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현대문명의 놀라움에 지레 겁을 먹었거나 혹은 우리가 추억하는 안락한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어 세상 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성찰이 필요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현대문명의 무시무시한 위력은 나이든 사람들을 위축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혼돈의 시대, 인문학 공부를 통하여 역사 속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되짚어 보는 성찰이 필요한 시대이다. 혹 우리 스스로가 노력하지 않으면서 세상과 시대를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대의 좌표가 어디로 향하여 있는지, 현대의 패러다임은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