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을 위기에 빠트리고 있는 것은 친박 정치인들이다. 집권 후 곤경에 빠졌던 역대 정권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친박 역시 집권 이후 세력을 확대재생산하기는 커녕 뺄셈정치를 계속하고 있어 위험하다.” 아마도 지난해 12월 초였을 것이다. 만찬자리에서 당시 이슈였던 청와대 문건파동에 대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한 친박 의원의 오만한 답변에 쓴소리를 한마디 던졌다. 그러자 그는 야릇한 목소리로 “내가 바로 친박핵심이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어떻게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느냐는 힐난으로 들렸다.
새누리당의 원내대표 경선이 선거초반의 우열 판세를 뒤집고 유승민-원유철 조의 압승으로 끝났다. 84대 65. `아무리 표차가 크게 벌어져도 10표를 넘지 않을 것`이라던 전문가들의 직전 예측까지 모두 빗나가게 만든 작지 않은 이변이었다.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소위 스스로를 `친박핵심`이라고 자처해온 정치 인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저러한 이유들을 떠올리며 극심한 배신감에 휩싸였을 수도 있다. 우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는 억하심정에 빠져들어 엉뚱한 아집을 키울 가능성도 없지 않다.
예상을 깨부순 여당 사령탑 선거의 결과는 새누리당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느끼게 하는 신선한 조짐으로 읽어야 맞다. 집권 만 2년을 채 넘기지 않은 시점에 고질적 `불통`오명 속에 통치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청와대를 변화시킬 저력이 여전히 새누리당에 남아있음을 절박하게 보여준 결과였다. 시린 민심의 바다에서 발을 아주 빼지 않고 국민들의 생각과 말을 신실하게 감지하려고 노력하는 다수 여당의원들의 진심이 노정된 것이다. 적어도, 새누리당에 새로운 `개혁`의 지표를 만들어낼 능력이 아직 남아있음을 증명한 쾌거이기도 하다.
유승민-원유철 팀의 압승을 견인해낸 결정적인 정치 환경은 무엇이었을까. 경선 직후 유 의원이 기자들에게 밝힌 대로 그것은 여당 의원들을 엄습해온 `위기의식`이었다. 정부여당에 대한 국민들의 신망은 날이 갈수록 꺼져 가는데, 이를 타개할 묘책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길었다. 청와대는 `문건파동` 같은 추태의 근원지로 추락하고, 참모들과 내각은 손발이 안 맞아 삐걱대는 모습을 거듭 연출한다. 그런 판에 “`쓴소리`가 아닌 `옳은 소리`를 내겠다”면서 끝내 청와대 눈치를 살핀 이주영 의원의 포석은 처음부터 현실적이지 못했다.
유승민-원유철 팀이 앞길에 놓인 험로를 어떻게 헤쳐 갈 것인지가 국민적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유-원 팀을 선택하지 않은 정치세력들이 우려해온 대로 그들이 당-청관계를 더욱 악화시켜 당을 `콩가루 집안`으로 만들고, 국민들의 등을 아주 돌려세울 것이라고 보는 비관적 전망은 무리다. 당-청이 적당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나쁠 이유도 없다. 청와대와 여당이 서로 상대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민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모습이 결코 나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청와대부터 과감한 인식의 전환을 꾀해야 한다. 어쩌면 대선공약에 발목이 잡혀 변환의 포인트를 만들어내지 못한 갖가지 난제들의 탈출구를 찾는데 새롭게 뽑힌 여당 사령탑을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증세`논란만 해도 그렇다. 유승민-원유철 팀이 민심을 정직하게 담아 `증세 없는 복지 확대론`에 대해 분명하게 다른 목소리를 내온 만큼, 그런 흐름을 슬기롭게 받아 안아 정책의 유연성을 키워가는 것이 옳은 방향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당-청관계의 발전적 미래를 위한 청와대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 셈이다. 이 시점에 정말 필요한 것은 `친박핵심`들의 하심(下心)이다. 진정으로 욕심을 덜어내야 한다. `친박핵심`들이 초심을 찾는 일은 박근혜정부 성공의 필수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