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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羊)들의 `침묵`

등록일 2015-01-20 02:01 게재일 2015-01-2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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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휘 서울본부장

`웅변은 은(銀)이요 침묵은 금(金)`이라는 말이 있다.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침묵은 말보다 웅변적`이라고 정의했다. 공자는 `군자는 변설이 번지르르하기보다는 실천에 용감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장자는 `다변불언(多辯不言)`, 즉 `말이 많으면 말하지 않음만 못하다`는 경구를 남겼다. 확실히 다변은 하찮은 요설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선조들은 `과묵`을 선비의 으뜸덕목으로 삼아 `양쪽 귀로 많이 들으며, 입은 세 번 생각하고 열라`고 가르쳤다.

이 같은 교훈들은 과연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유용한 가치를 지닐까. 어쩔 수 없이 불평등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경제적 약자들에게 침묵은 언제까지 미덕일 것인가. 폭압적 정치권력에 의해 모두가 시궁창에 빠져 살면서도 굴종 속에서 겨우겨우 삶을 영위하는 북한주민들의 침묵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중의 침묵은 다 괜찮은 것일까. `두려움의 크기와 침묵의 크기가 비례하는`세상의 온갖 부조리구조에 대해서 우리는 참 무심히 살아간다.

연초부터 연거푸 불거진 어린이집 아동폭력 사건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저출산 현상 타개책의 하나로 아동교육을 나라에서 책임지는 정책이 확대되면서 양질의 교사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그런데 정치권의 대안들은 어린이집 교사들을 잠재적 범죄인으로 몰아 때리는 CCTV설치 의무화나, 아동폭력 처벌수위 상향 등 구태의연한 대증요법 방식에 치우치고 있다.

지난 연말 여론을 달구었던 `땅콩회항`사건도 궁극적으로 침묵의 가치논쟁에 맞닿는다. 그게 어쩌다가 그렇게 이슈화가 되어서 그랬을 뿐, 거대 기업 대한항공의 내부에서 만연돼온 `을`들의 침묵은 수두룩 존재했을 것이다. 눈치 없이 침묵을 깼다가 `갑`의 무지막지한 권력에 생존을 위협받게 된 `을`을 더 많은 제3의 `을`들은 보았을 것이고, 침묵으로 지켜내는 온존의 대가가 훨씬 더 달콤하다는 교훈을 얻어왔을 것이다.

교사들 앞에서 자식을 맡긴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을`이다. 어쩌다 자질이 부족한 교사에게 자식이 맡겨졌을 때도 불안을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기업에서도 못된 `갑`질에 이골이 난 성품을 가진 오너나 상사들이 있다. 몰상식한 처사들이 비일비재 일어나지만, `을`들의 침묵은 미덕처럼 치부된다. 유사 이래 재력과 권력은 언제나 상관관계가 있었으며, 현대사회는 재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비율이 훨씬 높아져가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땅콩회항`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나, 최근 불거진 어린이집 아동폭력 사태를 놓고 전문가연하는 일부 해설자들이 `을`들의 침묵을 비판하는 요설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 `갑`질의 모욕을 견딜 수밖에 없는 절박한 환경을 정말 모르고서 저런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것일까 한심한 생각마저 든다. `갑`질로 피멍드는 `을`들의 현실을 개선하는 사명은 오롯이 정치지도자들의 몫이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은 더욱 처참해질 것이다.

1991년에 나온 미국영화 `양들의 침묵(The Slience Of The Lambs)`은 오래도록 최고의 명화(名畵) 반열에 올라있다. 도축을 기다리는 양들은 울음소리를 낼 뿐 도망치지 못한다. 그런 모순된 환경 속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현상을 도망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치명적인 오류다.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에게 숙명적인 공포의 울타리로부터 도망치지 못하는 양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정녕 있는가. 권력을 확대하고 연장하는 일에만 정신이 팔린 그들에게 과연 그런 의지가 있긴 있는가. `양들의 침묵`에서 희대의 악당 렉터(앤서니 홉킨스)는 여주인공 스털링(조디포스터)에게 묻는다. “아직도 꿈속에서 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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