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피데기

등록일 2015-01-20 02:01 게재일 2015-01-20 18면
스크랩버튼
▲ 김영식 시인

노을 너머로 피득피득 날아가는 것들이 있다. 가을빛 바랜 툇마루에 앉아 방금 걷어온 오징어를 손질하다 보면, 그걸 회한이라고 해야 하나? 어떤 맺힌 소리라고 해야 하나? 희수의 어머닌 반쯤 감긴 눈으로 축축한 오징어를 편다. 반 쯤 말린 것, 다 마르지 않은 것. 이맘때쯤엔 첫서리가 내리고, 바닷가 벼랑 틈마다 해국이 피고, 갯바위 위론 물오른 김들이 거뭇거뭇 검버섯처럼 돋아났다. 팔삭둥이처럼, 그 팔삭둥이의 에미처럼, 자신의 생을 반 밖에 완성하지 못한 것들의 쓸쓸한 건조.

투명한 속살을 만지다보면 안다. 눈물 같은 것, 눈물의 속살 같은 것. 밤바다는 무슨 기도가 많아 수평선 가득 연등을 매달아놓은 걸까? 심해에 제 생을 드리우는 채낚기어선들의 어로(漁撈). 나는 쪼글쪼글해진 몸뚱이를 펴고, 어머닌 차곡차곡 축을 만들고. 처마 끝에 별이 뜰 때까지. 그 별 중 몇 개 감나무 끝에 까치밥으로 흔들릴 때까지. 피득피득 상강(霜降)의 하늘 위로 오래 날아가는 것들이 있다.

가을이 되면 구룡포 밤바다엔 무수한 채낚기어선들 불빛이 내걸린다. 대낮처럼 집어등을 밝힌 어선들은 다음 날 아침 싱싱한 오징어를 포구에 부려놓는다. 집집마다 피데기가 속곳처럼 널리는 것도 이때쯤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수개 월 흉어기동안 허깨비 흉흉하게 나돌던 골목엔 수혈 받은 듯 활기가 넘쳐난다. 집집마다 웃음꽃이 피어난다.

어릴 적, 가을이 오면 먼저 해야 하는 작업들이 있었다. 오징어 건조를 위해 사전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마루 밑에 여름잠 자던 나무기둥과 대나무로 만든 침(針)을 꺼내 햇볕에 말렸다. 새끼줄을 사오고 마당과 골목에 기둥을 세울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 간격은 오징어를 널어도 줄이 처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대략 십 미터 정도였다. 먼지가 쌓인 창고와 빈 방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도 이때쯤이다. 말린 오징어를 판매하기 전에 쌓아두기 위해서였다.

손이 열 개라도 바쁠 때였다. 아침에 어머니가 사온 오징어가 마당에 도착하면 어른들은 배를 갈라 내장을 덜어내고 우물물에 씻었다. 어린 우리들은 귀 부분에 대나무침을 꽂았고 새끼줄에 널기도 했다. 그러곤 부랴부랴 밥을 챙겨먹고 학교로 갔다.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 피득해진 발을 갈랐다. 그대로 두면 서로 달라붙어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면 널린 오징어들이 파랗게 빛을 뿜었다. 그것은 꼭 반딧불이 같았다. 밤하늘로 날아가는 수많은 반딧불이처럼 오징어들도 은하수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반딧불이가 바다로 날아가 오징어가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밤이면 건조대 사이로 숨바꼭질을 했다. 키 높이보다 더 높게 널린 오징어들 뒤에 숨으면 술래가 찾기 어려웠다. 말린 오징어들은 오천이며 영천 등지에 장이 서는 날 팔려나갔다. 그런 날 아침이면 온 집안이 부산했다. 건넛방에 재어둔 것을 꺼내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보자기에 쌌다. 전문 판매업자에게 넘기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직접 보따리에 싸서 이고 장으로 나가면 값을 더 받았다.

지금은 집집마다 오징어가 널려 있는 풍경을 보기 힘들다. 전문적으로 건조하는 덕장에 가야만 그런 광경을 만날 수 있다. 어촌에 유휴노동력이 줄어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삶의 방법들이 더 이상 일차 노동에 기대지 않을 만큼 변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피데기는 다 마르지 않은 오징어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 마르지 않은 것, 제 생을 완성하지 못한 것, 피데기에는 그런 쓸쓸한 애환 같은 것이 스며들어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미완성의 삶을 사는 게 아닐까? 미완성이라 인생은 더 아름다운지도. 피데기를 보면서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부족하게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아침산책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