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TV 드라마를 보고 유행처럼 기사나 칼럼의 소재로 삼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최근 제대로 한방 먹었다. 지난 주말, 마치 폐인처럼 집에 틀어박혀 꼭 해야 할 일을 하느라 건너뛴 몇편을 빼고는 종편 드라마 하나를 뗐다. `이제서야 이걸 보다니`라는 마치 후회 같은 생각과 함께 엉뚱하게도 또 다른 `미생`이 된 느낌 마저 들었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갑과 을의 관계, 비정규직의 설움, 승자 독식과 다름 없는 상명하복에다 줄서기식 조직 문화.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게 더 큰 울림은 드라마를 다 본 뒤에 왔다. 공감이었다.
대졸 후 경험했던 청년실업의 끝에 서울 충무로에서 내딛은 사회 첫발은 아팠다. 골목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인쇄소는 가히 을의 막장이었다. 인류 3대 발명의 업종에 종사한다는 존엄은 없었다. 일감을 주는 원청업체 `임 대리`가 걸친 흰색 와이셔츠를 검정 잉크가 묻은 얼굴로 쳐다보는 인쇄공들의 눈빛은 주로 갑에 대한 공손함과 경계심, 이 둘로 나눠졌다. 하지만 우리 사회 을들의 현실을 알게 된 소중한 시절이었다. 무역회사에서는 해외 수출에 대한 자부심이 현실의 벽에 좌절할 때도 많았다. 러시아 거래처의 뒤를 봐주는 마피아 두목 부부를 접대하고 난 뒤, 그 나라는 내게 더 이상 도스토옙스키와 푸쉬킨 만의 대지가 아니었다.
이렇게 시작한 2015년인 만큼 올 한해 내거는 삶과 일의 목표는 간단해졌다. 우리 사회는 물론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공정과 불평등, 그리고 차별의 요소를 찾아 내어 개선하는 일이다. 가능한한 노여움도, 그리 거창한 결연함도 자제한 채 문제를 지적하고 주변의 공감을 얻어 조금씩 개선하는 그런 자세로. 단지 그 절실함과 진정성 만은 갑의 횡포에 몸서리 친 최근의 기억이 늘 함께 해야 할 것이다. 땅콩 회항에, 백화점 CCTV 모녀에, `경비원, 받아 먹어`에 몸서리 칠 만큼 쳤으니 이제는 더 이상 `하다 말다, 그럭 저럭, 흐지부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 대구경북도 성찰할 일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불균형의 처지를 늘 수식어처럼 달고 있는 현실에서 지역의 연대의식부터 점검해야 한다. 어떤 기회든 일단 먼저 누려야 한다는 중앙의 가공할 만한 기득권 유지 노력에 대해 대구경북의 지자체는 광역단체를 중심으로 공조 체제를 갖추고 있는가. 지역의 대학과 원로, 대경연구원을 비롯한 씽크탱크,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언론은 과연 지역을 가치의 중심에 두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포스코를 필두로 일자리 창출의 원천인 기업도 지역으로 부터 충분히 경쟁력의 요소를 지원받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경북도청의 이전은 대구가 근대 이전부터 오랜 기간 누려왔던 각종 이익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을 예고하고 있다. 기관의 이전이 자본의 이탈을 동반하는 위기에 맞닥뜨려 상당한 저항과 불협화음이 불을 보듯 뻔하다. 대구와 경북의 이 같은 홀로서기의 진통 속에서 신공항과 같은 공동현안은 대응의 적기를 놓칠 우려도 크다. 우리는 정부의 수도권 규제 완화 정책을 저지하지 못해 기업의 이탈을 경험하며 몸서리 친 기억이 있다. 따라서 대구와 경북은 변화한 현실에 맞게 새 위상을 찾도록 돕고 협력체제를 유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특히 포스코는 포항은 물론 대구경북이 대한민국과 세계에 자랑하는 동반자 기업이다. 회사에 전례 없던 지금 위기에 대한 예측은 지역민에게는 단순한 시사적 관심 대상이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이번 일은 역대 정치권에게서 끊임 없이 받아온 반경영적 요구에 포스코의 이전 경영진이 자의든, 타의든 굴복한 과오에서도 상당 부분 비롯됐다. 제철보국 신화에 몰락의 오명을 덧칠하지 않으려면 포스코는 지역의 조언에 귀를 열고, 지역은 김관용 지사와 이강덕 시장을 중심으로 포스코를 돕고 지켜야 한다.
지역언론은 올 한해 자기 점검의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 언론의 기형적 중앙 지배와 패권주의의 횡포에 지역은 늘 동병상련의 현실이다. 똑같은 구태가 확대재생산돼 지역이 몸서리쳐서는 안될 때도 이제는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