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링컨의 `포용정치`

등록일 2014-12-30 02:01 게재일 2014-12-30 19면
스크랩버튼
▲ 안재휘 서울본부장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민주주의의 금언(金言)으로 회자되는 `게티즈버그 명연설`로 주로 기억된다. 링컨이 정치사에 남긴 또 하나의 소중한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투철한 `포용정치`의 실천일 것이다. 그의 정치역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단 한번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을 뿐이고, 상원의원 선거에서 두 번이나 낙선했다. 무명 정치인인 그는 186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치열한 4파전 지명전을 거쳐 가까스로 당선된다.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지명전에서 그와 뜨겁게 경쟁했던 뉴욕 상원의원 윌리엄 시워드를 국무장관에, 오하이오 주지사 새먼 체이스를 재무장관에, 미조리주 판사 에드워드 베이츠를 법무장관에 임명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세상을 정말 놀라게 한 일은 자신을 평생 모욕하고 헐뜯던 정적인 민주당 법무장관 스탠턴(Edwin McMasters Stanton)을 전쟁장관(국방장관)에 전격 발탁한 일이었다.

링컨이 변호사였던 시절부터 유명 변호사 스탠턴이 뱉어냈던 험구는 상상을 초월한다. 대통령선거 당시에도 스탠턴은 전국을 순회하며 링컨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않으며 `깡마르고 무식한 자`라고 놀려댔다. 스탠턴의 지독한 험담 중 “링컨의 고향에 가면 얼마든지 고릴라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대목은 오늘날 되짚어 보아도 정말 악랄한 인신공격이다.

2014년 세모(歲暮)에 문득, 정적들을 모두 묶어 `경쟁자의 팀(Team of Rivals)`으로 내각을 꾸려 국론을 모으고, `노예 해방`이라는 전 인류적 가치를 놓고 벌인 남북전쟁을 끝내 승리로 이끌어낸 링컨의 리더십이 생각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올해도 어김없이 연초에 가졌던 정치적 소망이 잘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어림없는 한 해였던 것 같다. 4월 16일 돌연 진도 앞바다에서 날아온 `세월호 참사` 비보로 인해 온 나라가 혼미의 바다에서 허우적댄 한 해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참으로 많은 담론들을 쏟아냈다. `세월호 이전과 세월호 이후의 대한민국은 달라야 한다`는 주장에 너나 할 것 없이 공감했고, 대통령의 `국가개조`라는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해를 다 보낸 지금 우리가 정말 `세월호 이전`과 다른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후진국형 대형 안전사고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을 얼마나 낮췄는지에 대해서도 신뢰가 높지 않다.

정치권은 시종여일 `아전인수``편견아집``패거리의식``승자독식``배척불통`의 암운 속에 놓여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경청`에서부터 우리 정치권은 여전히 인색하기 짝이 없다. 청와대 신년회 초청자 명단에 이군현 사무총장 대신 `친박`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가 포함된 것을 확인한 김무성 대표가 청와대를 향해 “천지분간을 못 하는 사람들”이라며 분노했다는 소식은 그저 쓴웃음만 나게 할 따름이다.

스탠턴은 전쟁장관이 된 후에도 자기 생각과 다르면 대통령을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며 무례하게 굴었다. 그럼에도 링컨은 “스탠턴은 빈틈이 없는 사람이니 만약 그가 나를 `바보`라 하였다면 내가 진짜 바보일 것”이라며 그를 끝까지 품었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난 지 닷새 뒤인 1865년 4월 14일 포드극장 귀빈석에서 당대 유명배우 부스(John Wilkes Booth)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만다. 오랜 정적이었던 국방장관 스탠턴은 쓰러진 링컨을 끌어안고 “이 세계가 지금까지 본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여기에 누워 있구나”라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귀가 두 개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마지막 날까지 정치적 반대자의 소리를 소통, 설득, 포용의 지도력으로 `세 귀를 열고 들었다`던 링컨의 인품이 부럽다.

안재휘 정치시평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