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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청량산이 중국에 있었다면 이백·두보도 詩歌로 읊었을 것”

정철화기자
등록일 2014-12-26 02:01 게재일 2014-12-26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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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엔 인문이 흐른다`  송의호 지음  부글북스 펴냄, 296쪽
▲ 봉화 청량산 모습

현직 일간지 기자가 청량산의 인문학적 의미를 탐색한 책을 펴냈다.

현직 중앙일보 송의호(대구 총국장) 기자가 청량산의 역사와 현재의 발자취를 더듬은 `청량산엔 인문이 흐른다`를 발간했다. <부글북스, 296쪽, 1만4000원>

“아! 이 산이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이백과 두보가 시를 지어 읊었을 것이다”

조선 중기 지식인이자 산 매니어인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북 봉화의 청량산에 오른 뒤 남긴 찬사다. 그가 주목한 것은 빼어난 풍광 때문만은 아니다. 청량산에 흐르는 인문적 가치를 발견하고서다.

봉화 청량산은 소금강이라 불리는 자연경관은 물론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산이다.

청량산은 `해동의 서성(書聖)`인 통일신라 김생이 10년간 공부했고 최치원의 흔적이 남은 곳이다. 지금은 청량사 하나만 남았지만 불교가 흥성했을 때는 절과 암자만 작은 산에 33곳이 있었다. 또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의 산성을 증축하고 군사를 훈련했다. 산꼭대기에는 공민왕당이 남아 있고 골골이 노국공주 등 왕의 가족을 모시는 당이 있다. 유학자 주세붕은 산을 오른 뒤 열두 봉우리의 불교식 이름을 모두 유교식으로 새로 붙인다.

퇴계 이황은 열네 살에 청량산을 처음 오른 이후 49년 동안 틈만 나면 찾았다.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퇴계는 청량산을 아예 `우리집 산(吾家山)`이라 부르고 `청량산인`으로 자처했다. 그가 간 길은 `예던 길`이 되었고 낙동강 물길 구곡을 거슬러 올라가 닿는 청량산은 주자를 이은 퇴계의 학문적 시원이 됐다. 퇴계 사후 선비들은 청량산을 찾아 퇴계의 자취를 더듬고 글을 남기는 게 유행이 되었다. 그런 글만 100여 편이 전한다. 나라가 위태로울 땐 의병이 근거지로 삼았고, `광야`의 민족시인 이육사는 이곳에서 노래의 씨를 뿌리고 북경의 차디찬 감옥에서 쓸쓸히 숨져갔다.

지금도 인문과 예술 정신은 이어져 청량산을 소재로 한 노래와 뮤지컬, 그림이 만들어지고 산사음악회도 열린다.

송 작가는 올해만 수십 차례 청량산을 오른 뒤 청량산의 이런 인문 흔적을 길어올렸다. 그는 “퇴계 선생이 왜 그토록 청량산을 자주 찾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발걸음을 뗐다”며 “청량산은 그 답을 생각하게 하고 힐링까지 덤으로 주는 인문의 산”이라고 말했다.

/정철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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