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스스로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인류가 지속적으로 선택해 온 가장 보편적인 삶의 패턴을 정착과 유목으로 나누는 것을 따른다면, 우리는 질문에 대한 일정한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정착한 삶과 유목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서로 다른 것을 비교하려면 동일한 관점이 있어야 한다. 이 관점으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사용한 `시각`이라는 개념이 유용하다.
가령 `장미꽃이 피었다`고 할 때, 장미의 입장에서 보면 꽃을 피우려는 자신의 속성을 드러낸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장미 자신의 시각을 나타낸 것이고 이를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모나드(monad)라 했다. 모나드는 원래 `1` 또는 `단위`를 뜻하는 수학 용어였으나 모든 존재는 장미처럼 어떤 속성을 지녔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속성이 나타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런 무수한 모나드들이 다양성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장미꽃이 핀 것을 밖에서 보면 장미가 벌인 사건일 뿐이다. 세계에는 이 같은 무수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들뢰즈는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라 하고 노마드(nomade)의 세계라 설명한다.
나아가 모나드가 자기 한계 내에서 자신의 시각에 만족하는 것이라면, 노마드는 그 한계가 자기를 비하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인류의 대부분이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하게 된 것은 자기 비하임에도 불구하고 자족의 삶을 도모한 결과일 것이다. 모나드에는 `안전하다`는 뜻의 다른 어원도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성급한 이야기는 아닌 듯싶다. 그런데 2014년 오늘의 우리는, 오늘의 포항은, 오늘의 경북은, 오늘의 대한민국은 과연 정착한 삶을, 그래서 안전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 모두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포스코를 중심으로 성장해 온 포항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행히도 미래의 먹거리를 위해 우리의 포항이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는 소식만큼은 대단히 희망적이다. 우리가 영위해온 오랜 삶의 방식으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정착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광활하고 거친 그리고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는 유목의 땅에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도 어림없는 세상이다. 모나드의 가치관으로는 더 이상은 안 된다.
`이젠 더 이상 눈을 뚫어 말리지는 않는다./아예 목을 자르고/둘로 갈라진 몸통으로/물구나무서서/꼬리에 걸린 전신의 무게를/바닷바람에 실어 보내는 나날,//볕이 좋으면 기껏해야 사나흘이지만/그래도 온 몸을 자신의 물과 기름으로/적셔내야 하는 노역./그대는 베드로다.//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가!/그 대가를 치러낸 그대를,/우리는 껍질을 벗기고 있다./벗기면서, 군침을 흘리면서/곧 그대를 곱씹으며 지을 미소를,//본다.//살점 사이로/입 안 가득 돌아드는 그 쫀득한 고소함./그대의 껍질을 벗기면서/그대가 걸어갔었고/그대가 매달렸던/푸른 바다의 파도 소리,/비린 덕장의 바람 소리,//듣는다.` (`2014년 과메기 껍질을 벗기면서`, 필자의 시)
필자는 시인을 `대상을 다르게 보는 훈련이 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이 시를 통해 과메기장아찌라는 새로운 맛을 만들었다. 이제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예전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들뢰즈는 `노마드의 세계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처럼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 `나와 함께 하자`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하지만 참된 반복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다. 함께 차이를 만들자. 차이는 높은 가치를 선물로 준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를 비하시켜서는 아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