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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위의 담소(談笑)

등록일 2014-12-16 02:01 게재일 2014-12-1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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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선생님 냄새나요” 노작 시간, 은행 줍기를 하다가 세환이가 던진 말에 학생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장난기 가득한 눈길들이 킁킁거리며 필자를 보며 웃는다. 그 웃음에 은행을 털던 바람이 따뜻해진다. 은행 냄새가 지독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필자한테서 은행 냄새가 난다는 것인지, 반점(쉼표)이 있고 없고를 아는 아이들의 장난기가 필자는 너무 좋다.

진한 암모니아 향의 은행 냄새를 모두 아실 것이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냄새. 간혹 어르신들께서 소일거리로 은행을 줍는 모습을 본 적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학생들이 은행을 줍는, 그것도 수업 시간에 은행을 줍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즘은 누구나 편한 일만 하려하지 힘든 일은 하지 않으니까. 더군다나 귀하게 자란 요즘 학생들에게는 은행 줍기와 같은 힘든 일은 더 말 할 것도 없으니까.

어려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란 학생들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알 리 없다. 그러기에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낯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려라는 말은 청소년들에게는 외계인의 말이다. 어려움을 모르는 청소년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사회는 이런 청소년들을 보면서 혀를 찬다. 부모들은 더 이상 어떻게 잘해줘야 되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짓는다. 결국 모든 잘못을 철없는 아이들 탓으로만 돌린다.

학생들이 처음부터 배려와 희생, 절제를 몰랐던 것은 절대 아니다. 분명 어떤 무언가가 우리 아이들을 자기 안에, 또 디지털 속에 가둬 버렸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에 대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바로 정확한 원인 분석이다. 우리 아이들이 왜 저토록 나약해졌는지, 우리 아이들이 왜 저토록 자기밖에 모르는지, 우리 아이들이 왜 저토록 아픈지에 대해 철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냥 아이들 탓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필자는 앞으로 발표될 교육 연구 결과에 앞서 주장한다. “이제부터라도 학생들을 그냥 내버려두자!”라고.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들을 놓아줄 용기, 어른들의 욕심을 버릴 용기가! 그런데 과연 어른들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절대 불가능하다. 내 아이만큼은 의사가 돼야 하고, 내 아이만큼은 법조인이 돼야 한다고 모든 부모들은 생각하고 있으니까. 은행나무 밑에서 코를 막고 즐겁게 은행을 줍는 아이들을 보면서 필자는 필자부터 용기를 내야겠다고 다짐한다. 의미 없는 교과서와, 더 의미 없는 점수 따위와, 그리고 더 더 의미 없는 필자의 말 따위에 학생들을 가두지 않기로!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솔직히 이 다짐을 지킬 자신이 필자에게는 없다. 핑계 같지만, 점수 맹신주의 사회에 우리 아이들만 외딴 섬에 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장 고등학교 입시도 치러야 하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또 다른 아이들과 점수 경쟁을 해야 하고, 생존 법칙에서 지면 도태되고 마는 냉엄한 사회에서 살아남아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은행을 줍다가 필자만 혼자 심각해졌다. 한참을 웃던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필자가 생각났던지 필자를 본다. 그리고 한 마디 던진다. “선생님, 무슨 생각하세요?”, “선생님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생각했다” 아이들이 다시 웃는다. 정말 필자에게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분명한 건 좋은 냄새가 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만약 미안함에도 냄새가 있다면 필자에겐 온 몸 가득 미안함의 냄새뿐일 것이다.

세환이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선생님, 이 냄새나는 노동을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앞으로 500개만 더 줍자!” 하나, 둘, 셋을 헤아리던 아이들이 금방 숫자는 잊어버리고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기에 바쁘다. 앞으로 있을 고등학교 입시 이야기, 병원에 있는 후배 이야기 등. 12월 은행이 아이들에게 인내와 끈기, 그리고 이야기를 선물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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