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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자와 소통하는 나무 화가(畵家)

등록일 2014-12-02 02:01 게재일 2014-12-0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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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아침부터 겨울비가 촉촉이 대지를 적시는가 싶더니, 휴대폰으로 전해 듣는 부고 문자 메시지가 주말아침을 슬프게 만든다. 지역에서 화가로 한평생을 살아 오셨던 서양화가 서창환(徐昌煥·1923년) 선생님의 별세 소식은 어떻게 보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막상 소식을 전해 듣고 보니 선생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크고 작은 추억들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나무의 아름다움과 강직함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작가는 나무가 사람들에게 주는 유익함과 윤택함을 한평생 화폭에 담아 왔었다. 창작활동을 통해 제작된 1천여 점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나무의 아름다움과 나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연의 보편적인 진리를 표현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나무를 좀 더 사랑하고 생활 속에 나무숲 그림을 통해 나무들과 친숙해지기 위한 노력을 몸소 실천 했던 작가였다.

1923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대 일본 유학(일본 대학교)을 통해 서양화라는 미술양식을 체계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해방 후 월남하여 1946년 경북 영주에서 교사의 길에 접어들며 평생을 교육자와 화가라는 두 길을 함께 걸어가는 예술가의 삶을 살게 된다. 1947년 포항에서 교직생활 때는 포항 영일군청 회의실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변변한 전시공간이 없던 시절을 반영하듯 청포도 다방, 애린 예식장 등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포항에서 개인전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1999년 26회 개인전부터 필자가 근무하는 갤러리에서 이어진 전시에서는 고희 기념과 화집 발간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기도 했다. 전시회를 가질 때마다 함께 했던 술자리에서는 과거 일본유학시절부터 1970년대 활발했던 젊은 시절 작가활동을 하던 시기를 무용담처럼 재미나게 들려줬다. 어린 시절 부족할 것 없었던 집안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즐겼던 유년시절과 해방 후 공산정권을 피해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홀몸으로 남하하며 고생했던 청년시절은 평생 검소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 값진 경험이었다. 영주와 포항을 거처 대구에서 중등학교 교사생활을 이어 가며 경험했던 대구화단은 작가를 마치 그의 그림속 나무처럼 변함없이 한자리에 서있게 만들었다. 1960년대 대구화단이 새롭게 만들어지며 정치적 권력에 의해 예술적 가치를 평가 받던 시절에도 그는 고집스럽게 화실을 지키며 꼿꼿이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나무처럼 창작활동에만 열중했다. 늘 변함없는 푸른 나무를 좋아했고 초록색 푸른색을 즐겨 담았던 그의 작품 속에는 초록나무가 뱉어 내는 신선한 산소가 가득 했었다. 선생님 보다는 인생의 선배처럼 늘 거리감 없이 대해 주었고, 누구보다 가족들에 대한 사랑으로 늘 자랑을 아끼지 않으셨던 마음씨 좋고 넉넉한 할아버지셨다.

무작정 하늘로 솟아 오른 나뭇가지들은 신앙에서 오는 절대자와의 소통을 위한 매개체로 일관해 왔던 선생님은 이제 그의 믿음을 몸소 경험하실 것이다. 나무와 땅의 색조가 왜곡되어 나타나는 표현은 신비와 환상적 무드에서 오는 유토피아적 꿈을 찾기 위한 끊임 없는 그의 노력들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의 믿음이 되어 결국 그림이 된 셈이다. 한겨울 온가족이 모여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는 그림에는 굴뚝의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아마 이처럼 사랑스런 장면은 선생님이 늘 꿈꾸어 왔던 그림일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그리고 싶은 그림 많이 그려주시길 기도하며 이제 선생님을 나의 마음속에서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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