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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龍)의 `발톱`

등록일 2014-12-02 02:01 게재일 2014-12-0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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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휘 서울본부장

중국 춘추시대에 월(越)나라는 오(吳)나라를 멸한 뒤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그 배경에는 명제상 범려와 대부 문종(文種)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용의 발톱이 지닌 속성을 꿰뚫어본 범려는 월왕 구천(勾踐)의 만류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월나라를 떠나 생존을 도모한다. 뿐만 아니라 범려는 문종에게도 `잡을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화살은 사라지고, 토끼를 다 잡고나면 사냥개는 잡아먹는 법(飛鳥盡 良弓藏, 狡兎死 走狗烹)`이라는 내용의 경고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문종은 이를 반신반의하며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월왕 구천으로부터 속루검을 받아 자결하기에 이르고 만다.

노자의 도덕경 제9장에는 `공을 이룬 뒤에는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功遂身退)`라는 말이 나온다. 현대정치사에 있어서도 정치지도자들이 선거가 끝난 뒤에 공신들을 챙겨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측근만을 기용하는 근시안적인 용인술을 탐닉하다가 인사를 망치고 민심을 잃어 정치적 곤경에 처한 사례가 드물지 않다. 이런 현상의 원인을 놓고 전문가들은 `사냥`의 재능과 `정책수행` 능력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12년 만에 새해예산안이 법정시한을 지켜 처리가 된다는 희소식이 번져가는 연말 정국 한가운데 지축을 강타하는 괄목할만한 폭음이 터졌다. 그동안 온갖 풍설과 논란의 핵심에 자리해온 정윤회 씨를 둘러싼 권력다툼 내막이 담긴 청와대 동향보고서 문건이 언론을 통해 폭로된 것이다. 폭로된 문건의 내용이 워낙 강력한 정치적 휘발성을 품고 있다 보니 청와대가 진지하게 설명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지금까지 진행되는 과정들을 살펴볼 때 일단 문건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별반 이견이 없는 듯하다. 다만 문건에 드러난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보고서 전후좌우를 둘러싼 역학관계가 어찌되는지 등등 석명돼야 할 요소들이 적지 않다. 만약, 폭로된 문건의 내용대로 무관(無官)의 정윤회 씨와 십상시(十常侍)로 명명된 문고리권력의 막강한 인물들이 권력을 지니고 암투의 한복판에 있어왔다면 이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역대 어느 정권도 사적인 인연으로 맺어진 측근 인재들이 가까이에서 문고리권력을 장악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통치기간에 자신의 국정철학을 공유하면서 보좌하여 정책을 만들고 상황판단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측근들로 구성하는 것이 시빗거리가 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혼신의 노력을 다해도 태부족할 위치에 있으면서, 자기들끼리 이전투구의 권력다툼을 빚으며 본말을 뒤집어왔다면 그것은 결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윤회 동향보고` 문건 폭로사건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첫째는 철저해야 할 청와대의 보안 관리에 대한 심각한 우려다. 청와대 내부문건이 유출돼 나돌다가 기자의 손에 들어간 정황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박 대통령의 지적처럼 `국기문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둘째는 문건에 적시된 대로 `비선(非線)`이 실세가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암투를 벌였는지 여부다. 이제 대한민국의 정권이 그런 식으로 국정을 끌고 간다는 것은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청와대 안에서 정윤회 계열과 박지만 계열이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맥락없는 풍설이 시나브로 나돌고 있는 현실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차제에 모든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 박근혜정부의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는 시대에 맞지 않는 사람, 무능한 측근들 다 물리치고 아예 새 판을 짜는 게 어쩌면 더 좋을 지도 모른다. 기왕이면, 꽉 막혀있는 듯한 `불통`의 이미지를 훌훌 벗고 사통팔달 `소통`이 만발하는 그런 분위기로 새출발하면 어떨까. `용의 발톱`을 보고 그것을 보았다고 외친 자에게 허물을 덧씌우는 일에만 몰두할 때는 분명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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