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2월의 첫날이다. 어느 시인들의 시구에서처럼 마지막 달력을 벽에 걸며, 또 한해가 가 버린다고 한탄하고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하리라. 하지만 우리의 정신이 미숙해 고마워하는 마음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왠지 아쉬움이라는 감정의 언저리에만 얼쩡거리고 있을 따름이니 이를 어쩌랴. 아쉬움은 `필요할 때 없거나 모자라서 안타깝고 만족스럽지 못하다, 미련이 남아 서운하다`의 뜻으로 풀이되는 일종의 감정어이다. 특히 인생의 최고 정점에서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의 아쉬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느껴진다.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전 제주지검 모 검사장, 서울대 모 교수 등의 충격적인 소식은 과다한 경쟁사회가 낳은 재난으로 아쉬움을 남기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사회 지도층의 인사라는 점에서 우리의 충격 체감 정도는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자식의 성장을 지켜 본 부모들은 잘 알겠지만, 한 인간의 성장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를 찾아가는 길만큼이나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성장하고, 더구나 그 분야의 최고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인내와 노력이 덧대져야 가능할 것이다.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던 인재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이유를 도덕성의 결여에서 흔히 찾는다. 하지만 얼마쯤은 절제심의 부족에서 찾아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옛 선비들은 공부를 할 때 글공부뿐만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는 공부까지 아울러 행했다.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삼가는 신독(愼獨), 자신의 인격을 가장 먼저 갈고 닦은 다음 가정과 국가 그리고 세상을 생각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등은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절제(節制)란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해 제한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절제의 미학을 아는 사람은 적절한 수위의 정도는 물론이고, 모자람과 넘침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 온 교육을 되짚어 보면, 자신을 다스리고 점검하는 일은 아예 무시하고, 단순 지식을 암기하고, 시험점수와 등수를 높이는 일에만 집중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수치의 노예가 되는 교육을 받다 보니 언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근에 일어난 충격적이고 불행한 사건들은 그동안 우리가 무시했던 절제심의 귀환으로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공부뿐만 아니라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절제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경고음 같은 사건이기도 하며, 우리 교육의 패턴이 방향 전환을 해야 할 시점임을 암시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유정`이라는 소설의 주인공 최석은 당대 사회에서 존경 받는 교장선생님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친구의 딸 남정임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다 정성을 다해 돌본다. 최석은 부모를 잃은 어린 남정임을 연민의 정으로 대하다가, 그녀가 아름다운 여성으로 성장하자, 어느날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의 그런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서 가정도 학교도 다 버리고 시베리아로 도피해서 추위와 허기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여타의 통속소설처럼 최석이 남정임과 시베리아로 밀월여행을 떠났더라면, `유정`은 명작으로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절제의 미학만이 명작을 만들 수 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절제의 미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