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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등록일 2014-11-28 02:01 게재일 2014-11-2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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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식 시인

공중을 내려놓고 깃 속에 낮의 부리를 묻는 새를 무릎이라 부르면 어떨까? 종일 밖을 나부끼던 잎들을 불러와 고요해진 느티를 무릎이라 부르면 어떨까? 새의 무릎, 나무의 무릎. 어스름에 기대서서 나는, 직립의 시간들이 돌아와 제 심연과 따뜻하게 마주 앉는 것을 본다. 산자락 불빛들이 감국처럼 피어나고, 어두워진 골목이 담벼락 아래 길을 눕고, 꽃향유 향기는 두런두런 꽃대 위로 귀가하고, 쥐며느리는 지금쯤 부엌 살강 밑으로 스며들고. 물소리를 벗어놓고 잠시 흘러온 골짜기를 돌아보는 하구를 무릎이라 부르면 어떨까? 하루를 식탁 위에 차려놓고 둥글게 둘러앉은 저녁의 창문을 무릎이라 부르면 어떨까?

“무릎”하고 말하면 입술은 잠시 밖을 향해 둥글게 몸을 내밉니다. 그러다 가만히 안쪽으로 닫힙니다. 내밀어진 입술은 노동이고 닫힌 입술은 휴식입니다. 노동을 내려놓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릎을 굽히는 것입니다. 새들도 나무들도 종일 힘들었던 직립(直立)을 내려놓고 제 심연과 따뜻하게 마주앉는 자리가 무릎의 시간이죠. 고단했던 심신이 바야흐로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건, 불빛들이 감국처럼 피어나는 산자락이고, 흘러온 골짜기를 돌아보는 하구이고, 불빛이 잘그락대는 저녁의 창문이기도 합니다.

클림트의 그림 중에 `다나에`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다나에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의 왕인 아크리시오스의 딸입니다. 아크리시오스는 다나에가 낳은 아들에 의해 죽는다는 신탁을 받고 딸을 지하에 있는 청동 방안에 가두어놓습니다. 그리고 어떤 남자도 접근할 수 없도록 하지요. 그러나 하늘에서 이를 지켜본 제우스가 빗물로 변신하여 그녀의 두 무릎 사이로 스며들어가 교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페르세우스가 태어나고 훗날 원반경기 중 외손자가 던진 원반에 의해 아크리시오스는 사망하게 됩니다. 무릎을 굽히고 좁은 방안에 갇혀 누운 다나에의 모습은 관능적이라기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은 딸의 절망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로뎅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은 무릎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고요하게 사색에 잠겨 있는 작품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미술을 전공한 담임선생님은 학교 운동장 한켠 느티나무 아래 생각하는 사람을 시멘트로 조각했습니다. 유관순이나 이순신 등 역사적 인물의 동상에만 익숙해있던 어린 우리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근육질의 팔과 다리와 구부린 등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역동적인 사실감을 느꼈지만 그것보다는 무릎을 꿇고 생각에 잠긴 그의 표정에 더 매료가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종교든 기도는 대체로 무릎을 꿇고서 하는 것입니다. 신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저는 그것이 가장 정직하게 자아와 대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도는 신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 자신과 가장 날 것으로 만나는 의식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교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녀는 무엇을 간구했을까요? 고등학교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아직도 제 뇌리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후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아름다운 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두어 달의 뱃일을 마치고 귀가하면 어린 우리들에게 무릎을 밟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마사지였던 셈이었는데 당신은 파도가 출렁대는 바다에서 제대로 무릎을 굽혀 쉬지도 못하다가 집에 돌아와서야 그 고단한 항해를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 아버지의 무릎에선 파도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가 오래 들리곤 했습니다.

무릎은 인체에서 가장 큰 관절입니다. 무릎 위의 체중을 모두 지탱해야하기 때문에 상당한 압박을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무게를 견뎌내야 하는 일도 무릎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발이 욕망을 지향한다면 무릎은 쉼을 지향합니다. 발이 물질이라면 무릎은 정신입니다. 가을입니다.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무릎에 얼굴을 묻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고단했던 삶이 조금은 위안을 받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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