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봄 무작정 아무런 정보도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로마, 기거할 방도 구하지 않고 그저 `아는 선배 집에서 얼마간 머물다 보면은 방도 구하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떠난 그것은 소위 말하는 `유학`이었다. 예전에는 `삼단 가방`이라고 불리는게 있었는데, 그 속에 이것 저것 넣다보니 나만한 덩치의 가방만 3개나 됐다. 낑낑거리며 공항에서 짐을 보내고 20시간 이상(지금은 12시간정도) 기내에 몸을 실었다. 그저 부푼 맘뿐이었다고 할까. 신혼이지만 부부는 고생이란 걸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둘이 있으면 뭐든 다 할수 있을거라 생각한 것 같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 그랬는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부부는 긴 시간을 좁은 비행기에 실려 피곤함도 잊고 단숨에 날아갔다. 아마 갓 결혼한 부부의 사랑은 그만큼 컸나보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로마에 도착. 내 이름이 적힌 선배의 피켓을 보고 마냥 기뻤다. 며칠동안의 선배집 생활후 원룸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기거하는 방 바로 옆은 주인집 지하 주차장이었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한 방이었다. 대략 짐작은 갈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살 보금자릴 구한 셈이니 너무 기뻐 그날 조그만 파티를 열었다. 아뭏든 예술의 매력을 느끼고 몰두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게 하는 것 같다. 예술의 매력에 푹 빠져들다 보니 그냥 무슨 용기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한 생각으로 도전했던 것 같다. 예술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젊음의 힘인지, 예술의 힘인지는 모르겠으나 끝이 없는 곳으로 나는 도전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필자의 유학생활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어느날 아침 일찍이 살림살이 장만도 할 겸, 언어 공부도 할 겸 가까이에 있는 재래시장을 찾았다. 역시 이탈리아인들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도 좋아 유쾌했고, 감정 표현도 즉각적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주로 모음으로 이뤄져 있었고 일상의 대화중 이었지만 시적인 표현도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예술과 태양의 나라는 말처럼 그 곳은 매력적이었고 열정적이었다.
참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유학 생활 중에 작은 에피소드다. 이탈리아 사람도 목소리가 크지만 내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기에 벌어진 사건이다. 추운 날씨 때문에 전기장판을 사러가서 양모로 된 전기장판을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가격을 속이고 판 것 같아 다시 가 따졌는데, 점원이 막무가내였다. 짧은 이탈리아말로 따지는데, 그 점원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 말에 `목소리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생각나서 젊은 혈기를 최대한 발휘해 아주 큰 (목)소리로 따지고 마구 떠들어댔다. 당시는 이탈리아 언어가 안돼 우리말을 많이 사용 했다. 유학초기라 이탈리아말은 잘 안되는 상황이니 우리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랬더니 가게 점원이 깜짝 놀라며 윗층 창고로 뛰어가더니 내가 지불한 가격 보다 더 비싸고 좋은 제품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혈기왕성하던 시절의 웃지못할 추억이다.
어찌되었든 이탈리아도 사람 살아가는 정(情)이 있었고, 우리 나라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이었다는 느낌을 그때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인간적인 정서에서, 문화와 분위기속에서 인간의 감성을 그대로 표현한 이탈리아 오페라들이 발달했고, 아름다운 창법과 노래들이 발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었다. 한껏 흐드러진 가을 낙엽을 보며, 가을정서와 딱 맞아떨어지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날 잊지 말아주오(Non Ti Scordar di me)`를 한번 들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