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은 바람에 몸을 맡겨 자유를 얻고, 은행(나무) 위에 집을 지은 까치는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들판은 새로운 충만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줬으며, 산은 내려놓음의 미덕을 실천한 나무들에게 둥근 우주를 선물했다. 자연은 비움으로써 더 크게 채운다는 걸 사람들에게 몸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조급한 11월이다. 그러기에 놓을 줄 모르고 더 끌어안으려고 야단법석이다. 그 광경(狂景)을 지켜보고 있는 대문 옆 감나무만이 부끄러움에 더 붉어지는 11월이다.
감나무의 부끄러움이 깊어가는 요즘 필자는 학생들을 통해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세상 진리를 배우고 있다. 지난 주 노작 시간의 주제는 배추 묶기! 대다수 학생들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전학을 온 학생들이라 매 주 노작 시간은 학생들에게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시간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뭔가를 느끼도록 하기 위해 배추 묶는 방법과 간단한 주의 사항을 전달하고 곧바로 배추 밭으로 갔다. 그리고 각 자 해야 할 분량을 정해준 다음 필자는 조금 빠른 속도로 저만치 앞서 묶어 갔다.
조금 지나자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저마다의 방법으로 배추를 묶고 있었다. 필자를 포함한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도 늘 마음이 불안하다. 그래서 알아서 먼저 넘치도록 모든 것을 해준다. 아이를 위한다는 게 아이를 망친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필자는 조금만 믿고 기다려준다면 학생들은 그 어떤 일도 스스로 해 낼 수 있다는 걸 산자연중학교에 와서야 확실히 알았다.
열심히 배추를 묶던 한 학생이 외쳤다. “앗 따가워! 선생님 배추에도 가시가 있어요”, “맞아요, 저도 찔렸어요. 왜 말 안 해주셨어요?” 여기저기서 아프다고 야단들이다. “조심해야지. 약하다고 자신들을 무시한 너희들에게 배추가 경고하는 거야.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 수단이 있다는 것을 배추가 말해주는 거야” 배추 가시에 놀란 학생들은 모두를 더 조심해서 배추를 다시 묶기 시작했다.
“얘들아, 왜 배추를 묶을까?” 학생들에게 물었다. “…”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생각하는 것이 익숙한 학생들이기에 답을 기다렸다. 학생들은 늘 놀라움으로 필자의 기다림을 보상한다. 건이가 말했다. “배추의 꿈을 위해서요”, “배추의 꿈?”, “네!” 더 이상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어른들의 어설픈 말로 그 싱그러운 꿈을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당황하고 놀라는 것은 필자뿐이었다. 느낌을 아는 학생들은 가을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꿈을 보태어 배추의 꿈을 묶어 줬다. 배추 묶기가 끝나고 학생들은 저마다 파랗게 배추 물든 손을 자랑스럽게 들어 가을 태양에 말렸다.
아마 이런 학생들의 모습을 많이 낯설어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학교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수학 공식을 외우고, 또 기계적으로 외운 공식을 대입해 경쟁적으로 수학문제집을 풀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질 수도 있다. 괜히 책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이상적인 말로 사교육으로 잘 다져진 지금의 공(空)교육을 흔들지 말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위의 모습은 산자연중학교 노작 수업 시간의 모습이며, 아직도 학생들의 마음엔 곱고 즐거운 파란 배추 물이 들어있다.
학생들이 배추 물든 손으로 양파를 심던 날 서울에서 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 누구나 다니고 싶은, 정확히 말해서 부모라면 누구나 보내고 싶은 수도권 소재 특성화 중학교를 다닌 학생이다. 과연 그 학생이 무엇을 찾아 여기에 왔을까? 분명 한 건 영혼 없는 국어, 영어, 수학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영수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것을 그 학생은 필자에게 말해줬고, 필자는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을 통해 그것이 `배추 가시`라는 것을 확신했다. `배추 가시와 배추의 꿈`은 분명 이 나라 교육의 새로운 화두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