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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鄕日記 (귀향일기)

등록일 2014-11-05 02:01 게재일 2014-11-0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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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서 봉화군 봉성면장

□수주대토(守株待兎)

퇴근 후 노모(母)와 연속극을 본 후 운동장을 한 시간 가량 걷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걷기는 건강에도 이롭겠지만 나 혼자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거기에 밤하늘의 별은 덤이다.

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맑고 깨끗함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가을 밤하늘은 유난히 진해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안주가 되곤 했던 별을 볼 수 있으니 이만한 즐거움도 어디 있겠는가. 걷기 덕분인지 막걸리를 자주 마시는 편인데도 몸무게는 그렇게 불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예전같이 빠른 속도를 유지하며 걸을 수 없다. 걷다가 꼭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일이다. 여느 때처럼 운동장을 돌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싶어 발걸음을 돌려 달려가 보니 1천원짜리 3장이 달빛에 찬 이슬을 맞고 있었다. 운동도 하고 돈도 줍고 이게 바로 일거양득(一擧兩得) 도랑치고 가재잡고가 아닌가! 더군다나 깜깜한 밤중이라 보는 사람도 없으니….

어제 저녁에도 한참 걷다가 달빛에 흰 것이 보여 발걸음을 돌렸지만 기대와는 달리 빈 담뱃갑이었다. 이젠 몇 번 속아서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자꾸 눈길이 가고 발길이 간다. 옛날 어느 어리석은 농부가 달리던 토끼가 자기 밭 그루터기에 걸려 죽은 것을 보고 토끼가 또 달려와 그렇게 죽을 줄 알고 쟁기를 내팽개치고 종일토록 그루터기만 지켰다고 하던데 요즘 내가 꼭 그 꼴이다. 어두운 밤이었으니 망정이지 한낮이면 어쩔 뻔했노.

□추야정담(秋夜情談)

해가 부쩍 짧아졌다. 오후 5시만 돼도 어둑어둑하다. 만물이 겨울 준비를 한다. 은행나무도 노란 잎을 하나 둘 떠나보내며 겨울로 갈 채비를 하고 다람쥐도 양 볼에 도토리를 가득 물고 제 굴로 드나들기 바쁘다. 들녘의 모든 것은 시들어 다 빛을 잃어 가는데 지난 늦여름에 갈아 놓은 무와 배추는 무슨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도 되는 양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타작의 흥겨움은 콤바인이 앗아간 지 오래지만 그래도 가을 햇살은 따사롭고 콩깍지 속에 있는 성질 급한 콩들은 온 밭을 콩콩 뛰어다닌다. 화단의 맨드라미, 백일홍, 봉숭아도 자취를 감추고 국화만이 홀로 하얗게 무서리를 뒤집어쓴 채 아침을 맞고 있다.

짧아진 해 덕분에 들에 나간 어머니도 일찍 들어오신다. 퇴근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어머니와 TV 연속극을 본다. 어머니의 연속극관은 권선징악이 확실해야 한다. 주인공은 갖은 고초를 겪다가 나중에 잘 풀려야 하며 심청전의 `뺑덕어멈`이나 유충열전의`정한담` 같은 못된 조연이 있어야 제격이다. 회식이나 다른 약속이 있어 연속극을 못 본 저녁때 잘 다녀왔다는 인사 대신 “엄마 장보리는?”하고 물으면 “고 배라먹을 ×이(극중 연민정) 아직도 거짓말을 하고 다닌다”고 하신다. 내가 또 “비단이는?”하면 “아이고 어린 것이 핏줄을 우째 아는지”하며 내가 못 본 그날 방영된 연속극을 다 말씀해 주신다. 또 장보리의 신랑인 검사(극증 이재화)가 검사답지 못하고 너무 가벼운 것을 못 마땅해하신다. 이렇게 전편을 다 보고 어머니의 연속극관과 그런대로 일치하면 어머니의 총평은 한결같이 “이번 연속극 잘 됐다”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는가 보다. 연속극이 재미있어지려고 한다.

먼 산 꼭대기에서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오는 단풍과 함께 모자의 가을밤은 TV 앞에서 그렇게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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