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대한민국의 미래를 창출해낼 `시대정신`인가, 아니면 모든 정치이슈를 삼켜버려 국가발전을 가로막을 `블랙홀`인가. 정치권에서 촉발된 `개헌`논쟁에 연일 새로운 변수가 출몰하면서 광폭의 파고를 예고하고 있다. 개헌안 통과 의결정족수를 넘는 20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동의하고 있다고도 하고, 국민들의 70%가 개헌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연초에 이어 또 다시 `블랙홀`을 우려하며 반대의사를 재확인했다.
여권 대권주자 으뜸반열에 올라있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개헌론`을 놓고 냉탕·온탕을 들락거렸다. 김 대표는 중국 출장 중에 `개헌 봇물론`을 폈다가, 반향에 놀라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해프닝을 빚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 나타난 현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친박계 정치인들은 김 대표의 돌출행동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반면, `개헌 봇물론`에 쌍수를 들어 환영하던 새정치민주연합 쪽은 발언을 곧바로 접은 김 대표의 처신을 맹폭하고 있다.
정치 전문가들 중에는 김무성 대표의 `봇물론` 해프닝을 `실수`가 아닌 정치고수의 `치고 빠지기 식` 술수로 해석하는 측이 다수다. 결코 정치 햇병아리가 아닌 그가 `실수`했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잠시만 돌아보면 정치권의 `개헌론`은 그 뿌리가 만만찮다. 강창희 전 국회의장은 대통령이 올 연두기자회견에서 개헌 반대 의사를 천명했음에도 신년사를 통해 약속한 `국회의장직속 헌법자문위원회`를 발족해 5월 말 이원집정제(분권형 대통령) 등 1천500쪽짜리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새누리당 안에서는 `개헌 시기`에서부터 견해가 엇갈린다. 내년에 해야 한다느니, 그 이후로 미뤄야 한다느니 구구각각이다. 통치구조 개편 방향을 두고도 정치권에서는 견해가 맞선다. 이원집정제로 가야한다느니, 대통령 4년 중임제로 가야 한다느니 여야를 넘나드는 설왕설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잠룡들을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의 다양한 입장 차는 `블랙홀` 우려를 키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박 대통령이 찬물을 끼얹는 바람에 물젖은 장작이 돼버린 `개헌론`에 아무리 불쏘시개를 지핀들 `개헌정국`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헌론`은 날이 갈수록 기세를 키워갈 공산이 크다. 얽히고 설킨 계파갈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으로서는 난국돌파를 위해 `개헌론`보다 더 좋은 호재(好材)가 없다. 여당 내에서도 대통령의 브레이크를 의식해 일단 수위조절에 들어간 `개헌론` 주창자들이 목소리를 아주 죽인 것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정국`을 두려워하는 것은 일단 개헌론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면, 모든 정치의제를 삼켜버려 자신의 국정운영 설계도를 펼쳐갈 공간이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그런 우려는 본의 아니게 `호헌론`으로 오해될 여지를 남긴다. 작금의 국정난제들을 감안한다해도, 같은 이유를 전제한다면 다음 그 어떤 대통령도 `개헌`을 추진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박 대통령이 `개헌론`태풍을 차단하는 일은 이미 버거워진 것 같다. `지금은 아니다`라는 게 `블랙홀`의 논리인 만큼, 오히려 대통령이 분명하게 개헌 스케줄을 밝히고 국정협조를 청하는 것이 현명한 대응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대선기간인 지난 2012년 11월 6일 `4년 중임제`를 언급하면서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개헌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정기국회` 이후가 개헌의 적기가 아니라면 언제가 적기인가? 대다수의 정치인들은 진작부터 박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국민들은 지금 박 대통령의 `개헌`시계가 어디 쯤 가고 있는지, 어떻게 설정돼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