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주간 몽골을 다녀왔다. 겨울을 앞둔 시기라 푸른 대초원은 볼 수 없었으나 눈이 한 번 내린 늦가을의 정취를 카메라에 담고 왔다. 마침 EBS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푸른 초원에 말들이 뛰노는 모습은 반갑고 갈 수 없었던 지역까지 볼 수 있어서 몽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고층 빌딩 숲으로 가꿔지는 울란바토르도시와는 달리 변두리는 너무나 다른 환경이었다. 그 빈민들의 동네에서 수녀님들은 맡은 소임에 따라 유치원 두 곳과 초등학교 한 곳을 운영하며 몽골의 미래 꿈나무를 양성하고 있었다. 캄보디아를 방문하였을 때, 지뢰로 손과 발을 잃은 아이들의 학교에서 마음 아팠던 기억이 겹쳐지며 어떤 상황에서든 그래도 교육은 희망임을 발견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무리는 보지 못했으나 별빛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짧은 연극이지만 단결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모습은 신선하게 와 닿았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고 했다. 변화가 없을 것 같은 가난한 환경, 그 가운데에서 한 사람의 변화로 큰 변화의 시작은 싹트는 법이다.
예수님은 누구나 만나셨지만 당신을 만나는 가난한 이들, 병자와 소외받는 이들에게서 시작했고 하느님 나라에로 인도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 만남의 장소는 화려한 도시의 한 가운데가 아니라 변두리요 경계지역이었다. 그처럼 수녀님들도 도시의 변두리요 경계지역에서 만남의 장이요 변화의 장을 펼치고 있었다. 몽골 사회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체재로 변화된 것이 이십 여 년. 대통령 선거에서 한 후보자가 피살 되는 극한의 혼란한 모습까지 있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라”고 했던 어느 재벌의 총수처럼 사기의 화식열전에도 변화의 시기가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능률적으로 생업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고용하는 자를 잘 쓰고 때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줄 안다” 한비자는 “사물에 위험한 징조가 보이면 주저하지 말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결단을 내려야 할 위치에 있는 이에게는 시의 적절한 결단을 내리는 행위가 중요하다.
공자는 “진실로 자기의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면 정치에 종사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자기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처신이 바르지 못한 위정자는 결국 불신과 반발을 사게 마련이기에 처신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세월호 유족과 함께 하였던 어느 국회의원의 행위를 보면서 무엇이 진실인지 흐려지게 된다. 특권과 반칙을 없애고자 애쓰는 노력이 헛물켜는 것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초나라의 대부로 대외관계에서 적극적인 활약을 한 섭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을 때, 공자의 답은 `근자열원자래(近者說遠者來)`라고 했다. 가까이 있는 이에게서부터 선정을 베풀어 즐겁게 할 때, 먼 곳의 이들이 찾아오듯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호트프리트 단네일스(Godfried Danneels) 추기경은 희망과 기도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례에서 이미 특별한 왕좌의 길을 뜻하는 섬김의 길을 가도록 선택받았는데, 몸을 굽혀 요르단 강물 아래로 잠수하심으로써 어깨를 세상 아래로 낮추셨다고 했다. 이렇게 낮아짐으로써 타인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음으로써 완성하신 길을 통하여 잠시의 슬픔을 넘어 부활의 기쁨, 새로운 길이요 참 생명을 알렸다. 자신이 살려고 모르쇠로 진실을 흐려놓을 것이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처신을 바르게 함으로써 무너지는 신뢰를 세우는 길이 잠시의 아픔을 넘어 원하는 것을 얻는 원자래(遠者來)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