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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스타일

등록일 2014-09-23 02:01 게재일 2014-09-2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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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휘 서울본부장

정치연설이나 법정에서의 변론에 효과를 올리기 위한 그리스·로마의 화법(話法) 연구에서 기원한 학문인 레토릭(Rhetoric)은 현대정치에서도 중요한 요소다. 절체절명의 정치적 고비에서 유력정치인의 절묘한 수사(修辭) 하나가 꼬인 정국을 기적처럼 풀어낸 사례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유권자들의 반응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선거기간에는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말 한 마디가 표심의 향배를 결정짓는 주요변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혀(Tongue)정치`에 대한 탐닉이 깊어지다 보면 저질 선동정치에 빠지는 망조(亡兆)로 치닫기 십상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정치가 `선동`인 건 맞지만, 동시에 `선동정치`가 영혼 없는 허접한 말장난으로 변질되면 대중을 속이는 일마저 금기로 여기지 않게 만든다. 역사 속에 등장했던 무수한 정치인들이 이 잔인한 이치를 미처 깨닫지 못해 유성처럼 짧은 명멸(明滅)의 비애를 맞았다. 그래서, 공자님의 `그 말을 좋게 하고 얼굴색을 잘 꾸미는 사람치고 인한 이가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는 말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명언이다.

얼마 전 만난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은 솔직담백한 학자적 풍모를 잃지 않고 있었다. 장관 취임 두 달을 넘긴 그의 모습에는 개혁에 대한 의욕이 넘쳤고, 소신도 뚜렷했다. 기자들과 막걸리 잔이라도 놓고 앉아 허심탄회하게 교호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갖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막연하지만, 그의 스타일에서 유연하면서도 용이주도한 `소통` 느낌이 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내 최고 권위의 헌법학자로서 `초강성 개혁주의자`로 통하는 그를 발탁한 깊은 뜻이 설핏 읽혔다.

며칠 사이 정 장관이 구설수에 올라 야당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하고 있다. 출입기자들과의 자리에서 “국회가 통치불능 상태”라면서 “내각제였다면 국회를 해산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한 것이 빌미가 됐다. 그 자리에서 정 장관은 증세 논란에 대해 “증세 없이 복지혜택을 확충하는 게 이 세상에 가능한가”라고 반문했고, 공무원연금개혁에 대해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단지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정 장관의 소신발언을 놓고 새정치민주연합은 “본인이 아직도 헌법학자인지 착각하고 있다”고 힐난한다. 나아가 “빨리 대학으로 돌아가라”는 막말을 거쳐 “국회 모독 발언을 사과하고 즉시 사퇴해야 한다”는 요구로 증폭시키고 있다. 박 대통령의 `세비반납`언급과 정 장관의 발언은 시중에 나도는 화법과 일치하고, 내용 또한 국민여론과 합치한다. 이 나라 정치권에는 어쩌다가 대통령이나 장관이 민심을 대변하여 말을 한마디 할라치면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길길이 뛰는 야릇한 풍조가 있다.

정종섭 장관의 `국회비판`소동이 능력 있고 신념 뚜렷한 장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를 향해 `학교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정치인들은 진작 그런 말을 할 자격을 잃었다. 세월호 사고 이후, `국가 개조`의 역사적 사명을 걸머진 핵심 장관으로서 정말 필요한 것은 그 어떤 기득권층의 딴죽도 걷어차고 나아가는 옹골진 자신감과 강단이다. 지금 국민들의 진정한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화려한 레토릭을 구사하는 `혀 정치`가 아니다. 비전을 가지고 활발히 소통하면서 꿋꿋이 소신을 지켜내는 `진정성` 하나다.

정 장관은 취임이후 안중근 의사의 유묵에서 군(軍) 한 글자를 공(公) 자로 바꾼 `위국헌신공인본분(爲國獻身公人本分)`이라는 글귀를 즐겨 쓰고 있다. `일백 번 고쳐 죽더라도`굽히지 않겠다며 절개를 지켜낸 포은 정몽주 선생의 피를 대물림받은 그가,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도 눈 하나 끔쩍하지 않은 안중근 의사의 추상같은 충의까지 물려받아 소원대로 `대한민국 개조`의 큰 주춧돌을 놓는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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