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직전의 민심이다.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넌더리가 `국회무용론`을 넘어 `국회해체론`의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국회가 왜 그러느냐”고 묻고, “차라리 국회의사당에서 의원들을 모두 내쫓고, 국민복지시설로 리모델링하는 게 어떠냐”고 흥분한다. 물론, 도무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정치행태에 치솟는 부아를 견디지 못해 쏟아내는 비명이겠지만, 유례없이 만연된 분노가 위태롭다.
우리 국민들의 `정치혐오증`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회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회를 걱정하는` 일상이 지루하다. 눈 씻고 찾아봐도 칭찬받을 구석이라고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국회의 구태의연한 모습은 늘 국민들의 두통거리였다. 그래도 대한민국이 이 만큼 성장했으니, 국회의 역할과 정치인의 기여는 평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가는 웬만하면 “멱살잡이, 불법파업 말고 그들이 한 게 뭐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소수야당이 걸핏하면 의사당을 내팽개치고 길거리로 나서는데도 아무 일이 없을까. 여당은 어째서 매번 그런 상황을 어쩌지 못해 절절 매면서 무한정 요령부득의 막다른 골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작년 한 해는 여야 정치권이 국정원 댓글사건을 놓고 갑론을박 지지고 볶다가 허송세월했다. 올해는 `세월호특별법` 암초에 걸려 정치권은 아무것도 못하고 뒤죽박죽 망신살만 뻗치고 있다.
정치권 케케묵은 살풍경에 지친 사람들이 너도나도 막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잘못됐을 때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보여주는 전범(典範)`이라는 자조마저 흘러나온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붕당정치의 폐해로 인해 여론은 갈가리 찢겨 너덜댄다. 여당은 야당이 여당일 때 그랬다 들이밀고, 야당은 여당이 야당일 때 똑같았노라고 우문우답놀이를 지속한다. 그들의 응보주의(應報主義)식 설전은 도무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의 극치다.
우리나라는 영국과 미국, 일본을 따라 `양당정치`의 정치구조를 꾸려왔다. 짧지 않은 권위주의 시대를 겪어오면서, 대척점을 분명히 하고 싸움판을 벌이기에는 그게 효과적이기도 했다. 국민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딱 청·백 두 패로 나뉘어 박 터지게 치고박는 연습을 했다. 세상은 `좋은 놈` 아니면 `나쁜 놈`만 존재한다고 믿으며 어느덧 `힘센 놈이 좋은 놈`이라는 `승자독식`의 가치관과 몹쓸 `불복`의 습성을 굳혀왔다.
민주화시대가 도래하면서, `힘센 놈`앞에서 호기롭게 웃통 벗고 대들었던 용감한 이들은 영웅이 되고, 생각이 달랐던 많은 이들은 세파의 모다깃매를 맞았다. 국회는 씨름과 레슬링도 모자라 격투기장으로 변했다. 깃발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치고 때려 부수는 유치한 청백전은 여전했다. 그래서 뭐 좀 확실하게 바꿔보자고 내놓은 것이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이다.
안타깝게도, 새롭게 전개된 정치판은 또 다른 가관의 경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육박전 싸움질을 가까스로 뜯어말렸더니, 이번엔 아예 일을 안 해버린다. `소수(少數)`에게는 뭐든 골치 아픈 조건 한 가지 걸어놓고 버티고 노는 게 남는 도박판이 됐다. 왜냐면, 그렇게 해도 `다수(多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다수결의 지혜를 버린 대한민국 정치는 지금 철 지난 `대선불복` 고질병 환자들의 `소수독재(少數獨裁)` 함정 깊숙한 곳에 처박혔다.
지금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못한다. 정계개편이든, 비상조치든 하루빨리 이 답답한 정국을 뚫어낼 구처를 찾아내야 한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지도자들이 나서서 `통 큰`결단과 타협을 빚어내는 게 가장 좋다. 미국 국회의사당 어디에도 적혀있다던가, `좋은 결정이 가장 좋고 나쁜 결정은 좋지 않지만, 가장 나쁜 정치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정치`라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