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추석은 늘 가슴설레는 명절이었다. 아마 아버님이 예비군 중대장을 지낼 때였으리라. 추석이 다가오면 햇사과며 햇배가 궤짝 채로 줄 지어 들어왔다. 차례상에 올리려고 장만한 음식도 풍성했다. 갖은 채소와 쇠고기·돼지고기로 만든 전과 음식들이 부엌 한가득 넘쳐났다. 특히 서문시장에서 포목도매상을 하셨던 어머니는 추석이면 꼭 새 옷을 한 벌 사주셨다. 추석빔으로 장만한 그 옷을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으쓱해 하던 그 어린 날의 치기가 아련하다.
추석 날 아침 일찍 치르는 차례는 고역이었다. 외아들인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차례를 지내곤 했다. 차례 절차는 지루하고, 복잡했지만 애써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차례상을 차리는 것을 진설(陳設)이라 해 식지 않는 음식을 차렸다. 이어 △강신(降神: 향상 앞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집사자가 따라 주는 술을 세번으로 나누어 모시기에 붓고 두 번 절한다) △참신(參神 : 음양의 원리에 따라 남자는 두 번, 여자는 네 번 절한다) △진찬(進饌 : 진설에서 차리지 않은 나머지 차례음식으로서 식어서는 안될 음식을 차린다) △헌작(獻酌 : 제주가 신위에 잔을 올리는 절차) △ 계반삽시(啓飯揷匙 :메의 뚜껑을 열어 숟가락을 꽂고), 삽시정저(揷匙正著: 젓가락은 적이나 편에 올려놓는다) △ 합문(闔門 : 조상님이 식사를 할 수 있게 제청 밖으로 나가고 문을 닫거나, 제상 앞에 병풍을 가린 후 모두 엎드린다) △ 계문(啓門 : 연장자가 기침을 세번하면, 전원이 제청 안으로 들어오거나, 병풍을 걷고 일어선다) △ 철시복반(撤匙復飯 : 수저를 거두고, 메의 뚜껑을 덮는 절차) △사신(辭神 : 신을 보내 드리는 절차로서, 남자는 두 번, 여자는 네 번 절한다) △ 납주(納主 : 신주를 원래의 자리인 사당 감실에 모시고, 지방을 모셨을 경우 지방을 향로 위에 놓고 태운다) △ 철상(撤床: 차례음식을 내리고 차례상 등의 기물을 정리한다)과 음복(飮福 :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조상의 덕을 기린다)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격식 갖춰 지냈던 추석 차례는 20여년전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후 그만 두고 말았다. 차례상을 챙기던 어머님이 없는 상황이 되고보니 아버님도 고집을 꺾으셨다. 추석 차례는 추석명절 예배로 바뀌었고, 차례상은 가족끼리 함께 하는 간단한 아침밥상으로 대신했다.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른 요즘 그때 그 시절이 새록새록 그립다. 햇곡식을 방앗간에 가서 빻아 오라는 어머님 심부름에 한 나절 줄지어 섰다가 쌀을 빻아 날랐던 일,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쌀 반죽에 볶은 깨와 설탕으로 만든 송편 소를 넣어 반달모양으로 빚던 추억, 가마솥에서 뜨거운 김으로 갓 쪄내 쫀득쫀득하니 맛있고, 달았던 송편의 맛…. 무엇보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송편을 빚으며 도란도란 얘기 나누던, 그 그리운 정경을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됐다니 그리움이 가슴저릿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내 추석 명절 소회의 중심에는 언제나 돌아가신 어머님이 있다. 얼마 전 바이올리니스트인 큰 딸이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에 앞서 아버님과 출가한 누님 가족까지 함께 어머님 산소를 찾았다. 부모님께는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返必面)이라 했던가. 유독 큰 손녀를 아끼시는 아버님이 “먼 여행 떠날 때는 돌아가신 어머님께 인사하고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이뤄진 모임이었다. 명절이면 항상 전북 남원 시댁에서 보내야 했던 누님과 자형도 어머님 돌아가신 후 처음 산소를 찾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여서 큰 딸에게 할머님께 한 곡 선사하라고 했더니 `어머님 은혜`를 들고나왔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애절한 바이올린 멜로디를 따라 마음속으로 노래가사를 따라 불렀더니 애틋하고 그리운 마음만 깊어졌다. 올 해 추석도 이렇듯 그립고 아쉬운 마음속에 지나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