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대(明代) 왕양명(王陽明). 철학자이자 관리였던 그의 사상과 철학은 2천년 중국 철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당시 황제는 정덕제 주후조. 주후조는 `8호`라 불리는 여덟 환관에 둘러싸여 향락에 빠진 채 정사를 도외시했다. 35세의 병주부사 왕양명은 격무 중에도 항상 강학을 열어 후진 양성에 주력하면서 계속되는 황제의 기행에 8호를 내쫓아야 한다고 앞장서서 주장한다. 그러나 주후조는 충언을 올리는 대신들을 파직하는 등 군신 간의 소통(疏通)을 스스로 차단했다. 그 상황에서 왕양명은 36세 때 신상에 중대한 사건을 맞는다. 그는 당시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부패한 환관(宦官) 유근(劉瑾)을 탄핵하다가 투옥된 한 검열관을 옹호했다. 이 때문에 자신도 40대의 곤장을 맞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혔다가 귀주성(貴州省) 역승(驛丞)으로 좌천되는 등 질곡(桎梏)의 세월을 보냈다.
문무에 모두 능했던 왕양명은 학문을 연구하는 동시에 지방관으로서도 깔끔히 일을 처리했다. 그는 관청 정문에다 `관청민정(官淸民靜)`이란 글귀를 붙였다. 관(官) 즉, `공직자는 부정부패가 없이 맑아야 하고, 백성은 고요해야 한다`라는 경구다. 그는 공직자가 부패할 경우 그 폐해는 백성에게 돌아가는 것이며, 이를 사전에 예방하고 차단하고자 `관청민정`을 강조하면서 비리를 발본색원(拔本塞源)했다.
박근혜 정부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사정(司正) 드라이브`를 강도 높게 추진하고 있다. 정(政), 철(鐵). 해(海) 등 정부조직 곳곳에 부정부패가 있다고 규정하면서, 이를 척결(剔抉)하겠다며 칼을 빼든 것이다.
이는 국가를 건강하고 투명하게 만들겠다는 의지이자 국정목표일 수도 있다. 실제 비리 사례가 연일 속출하면서 검찰의 손이 바빠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신(新) 서정쇄신`이라고들 한다. 부패는 공공의 적이다. 이를 방관하면 나라가 거덜난다. 만약에 환부가 곪아있는데 정부가 도외시한다면 국민적 비난은 소나기처럼 쏟아질 것이고, 책임 또한 통치권을 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사건 등을 겪은 정부가 부정부패 일소에 나선 것은 박수칠 만 하다. 다만 통치권이 너무 전면에 나서는 것은 지적하고 싶다. 검찰의 통상적인 기본업무는 `사정`이다. 따라서 통치권은 검찰이 본래의 임무를 잘 하도록 판을 깔아주면 된다. 현재처럼 앞장서서 굳이 방향을 제시하며 재단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통치권이 나서 검찰에 드리이브를 걸고, 그걸 장기적으로 끌고가면 국가 기관이 전반적으로 위축된다. 국가 정책으로 `서정쇄신`이란 용어가 출현한 것은 유신정부, 즉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1975년이다. 당시 박 대통령은 공무원사회의 부조리를 일소하여 건전한 국민정신을 진작시키겠다며 정신개혁운동으로서 서정쇄신을 내세웠다. 3대 과제가 핵심이었는데, 첫째가 관료사회의 비리와 부정척결, 둘째는 사회정화, 셋째는 정화된 사회분위기를 국민 의식 속에 체질화시키는 것이었다. 관료사회의 부정을 척결해 관기확립(官紀確立)과 통치권을 강화시킨 이면도 없지 않다. 다목적 카드였던 서정쇄신은 성과 또한 적잖았다. 무사안일(無事安逸)이던 공직사회의 기강이 서고 사회 내 부조리가 척결되는 등 국가 분위기가 긴장하면서 후진국이던 대한민국 경제가 성장하는 촉매제가 됐다. 그러나 부작용도 많았다. 특히 고압적이고 하향식으로 추진되다 보니 부조리가 음성화돼 역부조리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부패`를 안고 출발했다. 그래서 구악(舊惡), 거악(巨惡), 적폐(積弊) 등이 생겼다. 사실 용어만 다를 뿐이지 권력은 관청민정이나 사회정화, 서정쇄신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그럼에도 `적폐`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누적되기만 한다. 누구의 책임일까. 작금의 피아(Fia) 색출작업이 국민적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줄지, 그 끝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