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48대 경문왕은 귀가 아주 컸는데, 늘 의관으로 가려 남이 알지 못하게 했다. 홀로 아는 비밀을 평생 간직해야 했던 복두장이(두건 장인)가 죽기 전 도림사(道林寺) 대나무밭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맘껏 소리쳤다. 그 후 바람이 불 때면 대나무들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를 냈다. 왕이 명하여 대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었지만 바람이 불면 여전히 소리가 났다. 삼국유사 권2에 나오는 `여이설화(驢耳說話)`다.
7.30 재보선이 새누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오래도록 수세에 몰려있던 청와대가 한숨을 돌린 모습이다. 하지만 선거 쾌승의 여파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김무성 대표다. 전당대회에서 큰 득표로 당권을 잡은 지 불과 보름 만에, `미니 총선`이라 불린 선거에서 낙승을 일궈냈으니 민심이 토끼눈을 뜨고 그를 여겨보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여론조사는 그가 단박에 차기대권주자 1위의 반열에 올랐음을 알리고 있다.
김무성의 정치를 논할 때는 `새옹지마` `구원투수` `뚝심` `대장` 같은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그는 때로 세력을 잃고 벼랑 끝에 서는 수난을 당하면서도 보수 새누리당의 둥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당이 어려운 상황에 빠질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백의종군으로 역할을 다하고는 미련 없이 홀연 자리를 내주는 `대인기질`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매력은 필요할 때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소신을 잃지 않는 `충언기질`에 있다.
김 대표는 지난 2010년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려는 친박과 야당 세력의 산더미 같은 파도에 맞서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라는 소신을 피력해 감명을 남겼다. 왕권시대 충신들의 가장 큰 특징은 문자 그대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소신을 접지 않는 선비기질이었다.
요즘 정치권의 기류를 들여다보면, 딱할 정도로 제대로 된 `소신발언`을 하는 정치인을 찾기가 어렵다. 민주정치시대에 정치인들을 가장 무력하게 하는 것은 포퓰리즘이 지배하는 오도된 민심이다. 그 오염된 민심 앞에서마저 `표(票)`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은 한없이 나약해진다. 최근 세월호 참사의 충격이 빚어낸 과잉감성에 대해서 정치인들은 뒤에서만 구시렁댈 따름 바른 말을 하지 못한다.
이런 풍토 속에서 나온 새누리당 주호영 정책위의장이나 홍문종 전 사무총장의 `세월호 참사는 해상 교통사고`라는 용기있는 발언은 존중되는 것이 옳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애끊는 심정을 헤아려 피해자 가족들의 웬만한 거친 주장은 감내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을 감당해야하는 국회의원들이라면 일부의 과도한 주의·주장에 대해 그 오류를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두 정치인의 발언을 `정권의 책임회피 목적`으로 몰고 가는 비판자들의 논리는 그렇다 쳐도 악의적이니, 패륜이니, 망언이니, 망발이니 하는 욕설은 가당치 않은 저질 정치공세다.
새로운 출발점에 선 여당이나, 재건축을 시동하고 있는 야당이 지금 가장 귀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은 `진실을 말할 자유의 확장`이다. 김무성 지도부는 박근혜 정부의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 민심을 정직하게 전달하고 주장할 책무를 신실히 수행해야 한다. 갖가지 선동술수로 민심을 호도하고, 오도된 민심이 무서워 무리한 요구를 묵인하거나 편승하는 정치는 더 이상 안 된다. “이 나라에 `세월당`이라는 신당이 생긴 거냐”는 자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않도록, 여야 정치권은 이제 세월호 충격을 감성이 아닌 이성의 영역 안에서 승화시켜 감동적인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당나귀처럼 큰 귀를 가진 임금이 절실한 시절이다. 그러나 큰 귀를 가진 임금을 빗대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할 자유가 온전히 보장되는 국가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소망하는 정말 좋은 나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