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를 듣는 나무` 김정기 지음 문학동네 펴냄, 156쪽
1975년 첫 시집 `당신의 군복`으로 문단과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반응을 이끌어냈던 시인은 1979년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고, `구름에게 부치는 시`(공저·1987), `사랑의 눈빛으로`(1989), `꽃들은 말한다`(2004) 등 시간이 흘러 시인의 이름이 거의 완전히 잊힌 뒤에야 그는 오랜 세월 가슴속에 묵혀뒀던 시편들을 조금씩 꺼내 선보여왔다.
시인으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가장 빛나야 했던 시절, 왜 그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금-여기에서 사라져야 했던 것일까. 3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보면, 시인의 남편이 뉴욕 UN 한국본부에 외교관으로 재임중이던 1979년 10·26이 터졌고, 시인의 남편은 하루아침에 외교관에서 `국가원수를 살해한 대역죄인의 측근 제1호`로 낙인찍히게 됐다. 시인과 가족들은 뉴욕에서 불법체류자가 돼 이국땅에 표류하게 됐다. 고통스러운 시간도 어느새 35년이나 흘러 냉혹한 낙인의 굴레는 벗었지만 시인에게는 `고국으로부터 잊힌 존재`가 됐다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꽃들은 말한다`이후 다시 10년, 시인이 굴곡진 지난 삶의 한을 가슴에 묻고 먼 곳에서 날려보낸 새로운 시편들은 오히려 이곳, 고국의 우리를 어르고 달랜다. 그의 시는 고통 속에서 끌어내 더욱 빛나는 깨달음을 물, 나무, 꽃 등 부드럽지만 강인한 자연의 이미지로 전달한다. 이 86편의 시들은 타국에서 고독과 그리움으로만 30여 년을 살아낸 시인의, 그럼에도 계속해서 세상을 마주하고 모국의 언어로 시를 쓰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김씨는 무너질 것 같은 자신에게 오랫동안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던 이와의 영원한 이별, 그리고 노년에 이방에 홀로 남은 이의 절절한 외로움을 절제된 언어로 읊조린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세상을 마주 본 시인에게 슬픔이란 솔직하고 강렬하게 발산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치기를 버리며, 순간순간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마음속에서 삭이고 다듬어 고매하고 세련된 결정(結晶)으로 만들어내는 과정. 그것이 시인에게는 `나이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독여 떨치고 일어서는 시인의 노련함과 원숙함은 이번 시집의 주된 분위기를 형성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